지식보다 위대한 것
고린도전서8:1-13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낄 수 있고 영향력을 끼칩니다. 많이 아는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배웁니다. 우리는 지식이 바다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을 펼쳐 놓을 수 있는 수단도 발달 되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만들어 주지만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은 맹목적인 열정이 되어 자신과 타인을 태워 버릴 수 있고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교만한 지식은 자기를 세우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1절)
고린도교회에는 우상에 제물에 먹어도 된다는 입장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두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기에 타협이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이 있고 우상은 없는 것이며 허상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했습니다.(5-6절) "약하다"(9.10.11절)는 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고 "민감하다" "여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우상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자유롭지 못하고 우상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불편하고 예민한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이 있다고 하여 그들 앞에서 자유롭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은 아직 약한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고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런 일이 직접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에 담긴 원리를 잘 이해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안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식은 부족하지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하나님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3절)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다 가졌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으며(고전13:2절) 지식에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벧후1:6,7) 성경에 어떤 것은 분명히 금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분명하지 않으며 개인이 자유에 맡기기도 합니다. “너 알아서 해보라”는 겁니다. 이때에 내게 주신 자유가 내가 속한 교회와 이웃, 약한 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상의제물 자체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우리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따릅니다. 13절 이 마지막 한 구절은 모든 문제의 분명한 답을 해줍니다. 자유포기 선언이요 사랑의 대원칙입니다. 사랑한다면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에 사랑을 더할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이 살립니다
어느 날, 한 가족이 놀러가다 교통사고로 7살 된 아들이 중상을 입었다. 응급수술에 급히 피가 필요했는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은 딸밖에 없었다. 다급한 아빠가 5살 된 딸에게 말했다. “얘야, 오빠가 급히 피가 필요한데 네 피를 좀 줄 수 없겠니?” 딸은 눈물을 머금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빠가 침대에 누운 딸에게 말했다. “얘야! 네 덕분에 오빠가 살았다!” 그 말을 듣고 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아빠! 저는 언제쯤 죽어요?” 알고 보니까 딸은 자기가 피를 뽑으면 죽는 줄 알면서도 오빠에게 피를 준 것이었다. 어린 딸은 지식은 부족했으나 사랑이 있었다. 살리는 것은 지식보다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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