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1-9
바울은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찬송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공황장애라도 온 것일까? 그가 한 가지를 결심하기를 앞으로는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1.2절)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테네에 갔을 때는 그는 잔뜩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철학의 중심지이요, 수많은 신화의 발상지이고, 학문의 도시이고, 새로운 학문과 이론이 발표되는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무명용사의 묘역처럼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단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내가 알게 하겠노라" 스타일 변신을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알지 못하는 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섬기다 섬기다가 못 섬기고 이름을 부르지 못한 찌꺼기 같은 이방신이 어찌 하나님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궤변이요, 하나의 종교 철학입니다.
시인의 말까지 동원하여 화려하게 말을 이어가가다가 끝머리에 가서 십자가와 부활을 말했으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바울의 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화려한 말에 눌려서 십자가의 이야기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바울이 핍박을 받지 않았으나 교회는 세우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의 글에 보니 십자가 금뱃지를 큰 것으로 단 사람일수록 사기성이 많다고 했는데 다는 그렇지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하여 궁금해합니다. 정말 예수는 믿을만한 것인가? 천국은 있는가? 지옥은 있는가? 그것을 나를 통하여 듣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그것이 궁금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할 말이 없다면 누가 우리의 말을 듣겠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명문장이나 탁월한 연설은 많은 역사에 남기도 합니다. 설교자들에게 가장 큰 유혹은 설교를 잘 하려는 것입니다. 화려한 말을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을 전하려면 세상에 대하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복음에 대하여는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나의 잘 난 것을 못 박아야 합니다.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기독교에도 지성이 있습니다. 기독교 과학이 있습니다. 기독교 철학이 있고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우주관 그리고 인생관이 있습니다. 이런 지혜가 어디서 온 것인가?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세상적인 달관(達觀)의 세계에 들어가서 스스로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으나 십자가에 못박는데 내어 주었습니다. 요한 칼빈의 설교를 보면 인간적으로 붙여 놓은 제목도 없습니다. 오로지 성경을 풀어가다가 가는데까지 가다가 계속하여 이어가는 형식으로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 두셨던 것을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고 지혜의 눈을 열어 주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도 알게 하여 주십니다.(마11:25)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보아야 하고 성령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군가 십자가에 매달려야...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의 종탑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종탑이었다. 지나가는 한 젊은 신사가 물었다. "형제들이여,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때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말을 했다.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저 십자가를 바라보시오." 그곳에는 어떤 한 사람이 십자가를 수선하기 위해서 높은 십자가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평소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십자가에 사람 하나 매달려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젊은 신사는 깊은 생각을 했다. “그렇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있어야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구나”
-오늘아침-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