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흔적도 남지 않으리라
욥기18:1-21
빌닷의 성격은 급하고 직설적입니다. 자신의 말에 자꾸 토를 달고 있는 욥을 향해서 “네 입에 말이 광풍과 같다”고 합니다.(8:2절) 그러면서도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8:7) 욥이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회복 될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18장에 등장하는 빌닷은 욥이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만을 제시합니다. 희망의 말은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악인이 겪을 최후의 모습을 욥을 통해 볼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빌닷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어디선가 들었던 말들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욥에게 하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를 읽을 때에 빌닷의 말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옳게 보이는 교훈도 그것을 절대화 시켜서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이다“라고 규정하면 다른 것을 없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은혜롭게 세워져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욥은 여기서 굴복하지 않습니다. 19장 25절에 보면 욥은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죽음에 이를지라도 죽음 너머에서 그를 다시 일으키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자체가 무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런 교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법에 의하여 절차를 따라서 시행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자도 때로는 다른 자의 구원을 위하여 억울한 고난을 받습니다. 욥은 고난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구속자를 바라보는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지금 재앙의 불구덩이 속에서 점점 빛나는 보석이 되어갑니다. 빌닷은 친구들에게 충고의 강도를 높이라고 주문합니다. 2절에 “너희”는 빌닷이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당신들은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참이요. 잘 생각해서 말 좀 해줍시다”라고 번역합니다. 욥이 치고 나오면서 오히려 친구들이 쭈뼛대니까 빌닷이 욥을 확실하게 잡자고 합니다.
5-21절까지 빌닷은 욥을 정상적인 상태로 보지 않고 정상적으로 논쟁하지 않고 막말을 퍼붓습니다. “네가 죽지 않으려고 아무리 파닥거려도 너는 죽음의 공포에 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릴 거라는 것입니다.(15절) 욥을 멸절 시킬 것이며 이 땅에 기억도 다 지워 버리도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처소도 이러하니라.”(21절) 24가지가 넘는 악인의 저주가 앞으로 욥에게 임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끝납니다. 빌닷은 악의 전문가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의 결과까지 예측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쓰러져서 넘어져 있는 친구를 살려내고자 하는 마음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하나님을 놓지 않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실지라도 죽음 너머에서 살아계시며 자기를 대속하실 살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도 욥과 같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자세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자유를 주는 첫날의 은혜
독일 교회의 예배당에는 피아노가 없다. 독일 교회의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한인 교회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고 한다. 어떻게 예배당에 피아노가 없을 수 있을까. 독일 교회, 즉 루터교회에서는 규례에 따라 예배당에 피아노를 놓지 않았다. 예배당을 지을 때 악기는 파이프오르간이어야 한다는 규례가 있다. 그래서 피아노는 배제되었다. 피아노는 거룩한 악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피아노에 익숙한 한인 교회로서는 당황스럽다고 한다. 우리도 예전에는 본당에서 통기타를 칠 수 없었다. 세상의 가수들이 치는 딴따라 악기를 예배당에 들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은 교회의 본당에 드럼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악기가 거룩한가? 악기가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지 않는다. 그 악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악기를 들고 가요가 아니라 찬양을 연주할 때 그것이 거룩한 것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주안에 있는 자는 자유하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일을 벗어나 ‘주간의 첫날’을 지킨 것이다. 주일은 ‘복음이 주는 자유’의 가장 큰 증거 중 하나이다. 회복의 때가 되었다. 이 자유를 다시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