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날이 다 가버렸구나
욥기17:1-16
보석에 오물이 묻어 있을 때 그게 보석일까요? 아닐까요? 깨끗이 씻으면 다시 빛이 납니다. 보석은 그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욥은 온 몸이 진물이 나서 입고 있는 옷과 피부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나 그는 더욱 빛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볼 때는 보석의 가치는 사라졌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며 나는 슬퍼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고 있다는 바울의 고백이 욥의 모습니다. 욥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16:20) 욥의 내면은 하나님이 위로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 되었구나”(1절) 이 말씀은 허무주의자의 푸념이 아니라 시가서에 나타나는 문학적으로 표현입니다. 자신은 지금 무덤 앞에 서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영적인 거장들을 욥처럼 늘 죽음을 곁에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인생은 1회성입니다. 얼마나 빠르게 지났는지 베틀의 북과 같이 지나갑니다. 한 번 호흡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무덤과 살아 있는 자는 한 걸음 차이입니다. “그들의 충동함을 내가 항상 보는구나”(2절) 욥의 죄인 됨을 증명하려는 사람들 뿐이고 누구도 욥이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 나의 보증을 서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3절) 나를 옳다고 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보증을 원하는 욥의 영적인 태도, 이것이 하나님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복음서들이 늘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욥은 지금 살아 있으나 그림자 같이 존재감이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한때 유명해져도 시간이 지나면 없는 겁니다. 욥의 신세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이는 놀라고 어떤 이는 비난을 하지만(8절)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9절) 친구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굳세게 살려고 깨끗한 손으로 살려고 오히려 더 결심을 합니다. 잘 가던 길도 자꾸 비난하고 비방하면 가던 길도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으나 가던 길을 꾸준히 가고 깨끗한 자는 날이 갈수록 큰 힘을 얻을 것을 확신하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루 종일 피곤한 가운데 일하던 사람은 저녁에 따뜻한 이부자리가 그리운 것처럼 욥은 지금 죽음의 자리에 이부자리를 깔고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생명을 거둬 가신다면 자기 죽음을 수용하고자 합니다. 언제 데려 가시더라도 편안히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 앞에 직면하면 살면서도 그것이 나에게서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은 의미 있게 살고 그리고 지혜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 부르시더라도 그 앞에 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자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널빤지에 눕다
유영모 선생을 아시는가? 아마 드물 것이다. 유명한 기독교인이면서 동양사상에 능통하신 분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잘 아실 것이다. 그 함석헌의 스승이 유명모이다. 같은 시대에 활동을 하셨는데 함석헌이 유영모 선생한테 스승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분에 얽힌 이야기 중에 잠도 푹신한 데서 안자고 널빤지 같은데서 평생 잤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이 널빤지를 관으로 만들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 분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그 널빤지로 관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친구처럼, 그림자처럼 안고 산 것이다. 널빤지 깔고 편안히 누어서 욥의 심정을 느껴 보면 어떨까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