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의 의미와 보상 데살로니가후서1:1-12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2020년 11월 10일 오전 08:11
- e 994
환란의 의미와 보상
데살로니가후서1:1-12
데살로니가에는 핍박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미 떠났으나 남아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은 계속에서 그 핍박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란”(4절) 첫 번째 편지를 보내고 나서 몇 달이 지났는데 전보다도 상황이 더 나빠졌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성도들을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라 왜 이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이 핍박의 끝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까지 언급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두 번째 보고를 듣고 나서 “당연하다”(3절)고 합니다. 뭐가 당연합니까? 도대체 바울이 뭐 때문에 당연하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놀랄 정도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더욱 자라고'에 해당하는 기본형 '휘페라옥사노'(υπεραυξανω)는 υπερ(~을 넘어서)와 αυξανω(성장하다)의 합성어로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열대 우림에서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듯이 믿음이 더욱더 자랍니다. 더 자랄 것이 없을 정도로 풍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 역동적으로 자라고 있음을 감사했습니다. 버섯을 키우는 데는 하나님께서 하룻밤만 사용하십니다. 하룻밤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참나무를 키우기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도 폭풍과 그리고 시간을 흘러가게 하십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나이테를 쌓아가면서 잘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5절)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자로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헛되이 받는 핍박이란 없습니다. 장차 칭찬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잠시 받는 고난도 하나님 앞에 가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 대로 큰 환란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환란 받는 자에게 안식으로 갚으시겠다고 하십니다.(7절) 환란이라는 말은 “들립시스”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의 어원은 무거운 돌에 가슴이 눌려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인들은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이 긴장과 억압과 두려움으로 지내야 했고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환란을 당할 때는 단 하루 밤도 편안히 잠들 수가 없습니다. 언제 붙들려 갈까.. 언제 고문 당할까.. 언제 죽을까 잠시라도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안식이란 말은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 상태로 느슨하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핍박과 환란에 놓여 있는 자는 그 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입니다.
주님이 임하실 때에 믿는 자에게는 복된 소망 있겠지만 불신자에게 심판의 날 됩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치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됩니다. 복음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응하지 않은 사람도 심판의 대상이 돌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과 그 힘의 영광을 떠나“(9절) “영광을 떠나”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에는 주님의 임재로부터 떠난 영원한 멸망의 상태입니다. 멸망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제외되는 되는 겁니다. 지옥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나간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박근상목사(신석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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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보상
가룟 유다가 찾아갔을 때 유대 지도자들도 돈을 내밀었다.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주는 보상이다. 유다가 돈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어찌되었든 간에 예수께서 자주 가시는 은밀한 장소까지 유대 군사들과 동행해주는 수고를 통해 받은 거마비(?)는 은전 삼십이었다. 주님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면서 보상으로 받는 거마비(車馬費)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돈을 챙기면서 마땅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것이나 학문의 권위를 파는 것이나 기술을 말아서 받는 돈을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보상이 돈이라는 생각이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추구하는 바는 자유로운 이윤 추구가 아닌가? 뭐든지 팔아서 돈벌이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오직 돈만이 보상이라 믿고 집착하면 거룩한 일도 돈벌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원리안에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배부름을 모른다. 끝이 없다. 어느 대교단 교단장 취임 예배에서 몇몇에게 공로패를 주면서 하나에 1억 3억으로 갚으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공짜가 없다는 말이다. 받아 내겠다는 것이다. 기관장과 불신자들 보는 앞에서.....예배시간에... 정말 부끄럽고 부끄럽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많은 바치는 자가는 자가 복된 자가 아니다. 조금씩이라도 고이면 계속하여 흘러 보내는 것이 복이다. 그 샘이 보낸 물은 큰 강물의 근원이 된다. 모으지 않고 보냈기에 그 물줄기에 의존해 살던 숲과 짐승과 사람들이 산 것이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보상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