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라
베드로전서4:12-19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때는 성도들이 혹독한 고난과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주변의 상황은 믿는 자가 두려움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마땅히 여기라고 합니다.(12절) 핍박 조차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잘못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면 우리를 미워하기 전에 주님을 먼저 미워한 것이요 우리가 주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핍박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요15:17-)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편이 되어서 세상의 옹호를 받든지 주님의 편이 되어서 주님처럼 고난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는 없습니다.
신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3절) 세상에서 당하는 그 고난들을 다 합하고 거기에 몇 수십 수백 곱을 해도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함께 하십니다.(14절) 고난의 때에 주의 영이 그 사람과 함께 하시며 감싸주시고 위로하여 주십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는 현장에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고 한없이 고요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행7:50-60)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본 바울이 신자는 무엇을 위하여 죽는 자이며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바울이라는 위대한 종을 낳는 진통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딤후3:12) 고난을 당할 때에 비교할 수 가 없는 영광을 주실 것을 생각하며 걸어가야 하겠습니다.(롬8:18)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이며 상당부분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15절)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기독교의 미래를 걱정해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통탄할 일인가? 우리가 할 일을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고 돕고 격려하고 덮어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잠26:17)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오늘날은 예수 믿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문을 비롯해서 단 세 번만 나오는 명칭입니다.
첫째는 안디옥교회에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북쪽의 안디옥까지 온 사람들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을 했습니다.(행11:26)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라는 좋은 의미의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두 번째는 그러면서도 때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비웃고 멸시하는 이름으로도 쓰였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를 증거하자 왕이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다소 무시하고 경멸하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에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6절) 사도들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심문을 마치고 공회를 떠나갔습니다.(행 5:41) 의로운 사람도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한다면 장차 경건치 않은 사람과 죄인들이 받을 심판은 얼마나 크겠는가? 땅에 사는 동안에 고난을 적게 받으면, 하늘의 영광도 적고 주님을 위한 고난을 많이 받으면, 하늘의 영광은 매우 큽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땅에서 주를 위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더 세한 것은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하면 본 모습이 보인다.
공자는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논어.자한 편) 공자의 이 표현은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에 담았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힘들고 외롭게 살아가던 추사. 제자였던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은 중국을 오가며 구한 서적들을 위험을 감수하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야속한 세태와는 달리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그에게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선물한다. 외딴 초가집 한 채와 소나무 몇 그루를 그린 그림이다. 한겨울의 소나무처럼, 사람도 어려움에 처하면 '본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모습도 그렇고,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모습도 그렇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