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가득합니다
욥기32:10-22
우리는 말하는 것에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런데 듣는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평상시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상당부분 구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보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말을 잘들을 때에 그에게 합당한 말을 해 줄 수가 있습니다. 엘리후가 할 말이 많았다는 것은 자세히 듣고 그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야 될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말의 힘이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엘리후에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욥이 엘리후를 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과 직면하여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엘리후가 긴 설교를 하고는 것으로 끝났으나 욥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진심이라고 다가 아닙니다. 진리를 말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진심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말하고 있는가? 언제 말하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엘리후는 마음에 가득 쌓인 말들을 쏟아 놓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누구의 말’도 ‘누구를 위한 말’도 아닌, 그저 말일 뿐입니다. 그런 말들에 진심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요? 설교자가 청중에게 말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에게 말하듯이 독백을 하듯이 하고 있다면 차라리 혼자 중얼 거리면 되는 일입니다. 엘리후가 긴 말을 하는 가운데 욥은 한번도 반응하거나 묻는 일이 없었습니다. 엘리후의 말이 옳아 보이고 진실일지라도 욥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교자로서 준비를 하다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기 전에 가슴에 가득 쌓여 있는 말들을 비워내고 덜어내는 일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입에 가득 찬 말을 다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버리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서 전하는 것을 잊지 말자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을 봅니다. 18-19절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속에 발효되는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가 곧 터질 것 같고 이것은 뽑아내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습니다. 그의 생각의 주머니가 부풀어 올라서 터질 것 같았다는 말은 그가 욥과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충분히 들었다는 말입니다. 주의 깊게 듣고 상대방을 깊이 관찰하지 않으면 생각의 주머니가 가득 차는 일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주의 깊이 보고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생각이 부풀어 오르면 그 주머니를 펼쳐도 좋은 시간입니다. 지금 내 속에 무엇이 끓어오르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입을 다물고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씀은 내 안에서 거룩한 압박을 내게 가합니다. 나를 견디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게 되어 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님은 “내 마음에 불이 붙기 전에 어떤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불을 붙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외치고 전하는 자는 터질 것 같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엘리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입을 엽니다.(21-22절)
25번 외우면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리로 세상을 끝냈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