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학생선교회(CCC) 국제본부가 올랜도로 옮겨왔다. 아내는 대학시절 부터 한국CCC(총재 김준곤 목사)에서 활동했고 졸업 후에도 모교인 숙명여대 에서 CCC 간사로 사역했다. 이 때문에 CCC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아내는 국제본부가 이사를 오자 바로 CCC 사역에 참여했다.
나 역시 관심을 갖고 기도하던 중 부부가 함께 CCC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 다. 곧 선교사 훈련과정을 밟고 싱가포르로 떠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부모님은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올랜도 국제본부신학교(TOI)에서 교수로 사역할 수 있는 길이 열렸 다. 학장님과 한인 사역을 위한 커리큘럼을 구상하고 연장교육 및 분교 프로그 램 등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갔다. 차츰 효과가 나타나자 나는 한국부 책임자 (Korean Program Director)로 임명됐다. 초기에는 GCTC(Great Commission Training Curriculum)란 훈련을 9개월동안 아내와 함께 받았다. 학위가 있어도 이 과정을 수료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훈련시킬 수 없어 학장님으로부터 개인레슨을 받았다.
CCC에서의 사역은 그야말로 감동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목회는 그렇지 못했다. 올랜도는 당시 한인이 수천명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체적으로 CCC 국제본부 사역에 참여하자 성도 중 몇 명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들은 목회자인 내가 CCC에서 사역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성도들에게 외친 말이 있다.
“만약 CCC 사역을 그만두게 하면 교회도 떠날 것입니다”
CCC 사역을 교회 발전의 연장선상에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목회를 통해 목사로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영광과 특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CCC 국제본부 신학교의 커리큘럼에 지도자를 양육하는 프로그램을 연결하고 한국 젊은이들에게 특수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민 목회를 감당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제3세계에서 선교하는 한국의 선교사들은 바울처럼 목사 선교사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사역을 잘 감당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 것일까”
이때마다 위로해준 분이 바로 CCC 창설자 빌 브라이트 박사였다. 이 분 때문에 CCC를 더 떠날 수 없었다. 브라이트 박사는 내게 가장 큰 도전과 비전을 안겨준 분이었다.
한 지붕 아래서 사역하며 그분의 헌신된 삶의 자세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소유,겸손,성령충만한 삶,복음 전도자로서의 두려움없는 열정을 가지고 주님의 노예로 사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힘을 얻고는 했다. 현재 브라이트 박사는 81세 고령인데다 암으로 투병한지 7년이 되어간다. 게다가 호흡량이 일반 사람의 반밖에 안돼 산소 마스크를 항상 착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이트 박사는 젊음의 열정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런 모든 삶의 모습이 알려져 그는 템플턴상 종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브라이트 박사와 함께 사역하면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