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담당자들은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 중 하나가 하반신 마취였다. 마취사는 조심스럽게 마취제를 투여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두번째 척추에 마취 주사를 놓는 순간 극도의 아픔에 아내는 비명을 지르고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마취사는 짜증을 내며 마침내 욕을 해댔다. “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겁니까? 전신마취를 합시다”
담당 의사는 다시 한번 천천히 시도해볼 것을 권했다. 마취사는 차분한 마음으로 마취제를 투여했다.
이내 아내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뒤 의사는 “임신 맹장을 누가 진단했는지 기가 막히다”면서 “그 의사는 참으로 명의”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불순물이 가득 찬 채 곪기 시작한 맹장을 떼어내 보여줬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회복실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던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하혈을 해요. 도와주세요”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들이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며 초긴장 상태가 됐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 경우 아이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안정을 취하십시오”
아내는 꼼짝 않고 병원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모교회인 송도교회로 달려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또 생기는 것입니까. 태중에 있는 어린 생명을 붙잡아 주십시오. 아내에게 힘을 주십시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성경을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아갔다. 하혈은 곧 멈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깨끗하게.
몇 번의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긴 아내는 퇴원한 뒤 바로 서울로 올라와 복직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5∼6층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만삭이 된 아내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힘든 내색도 없이 학교와 집안일에 모두 열심이었다.
어느덧 아내의 출산일이 다가왔다. 나는 충현교회(당시 김창인 목사 시무) 부목사로 있으면서 교회의 협조로 마침 담임목사가 없던 광현교회에서 심방과 설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날은 수요예배를 인도해야 했고 성도들의 심방이 줄지어 있어 하루종일 아내에게 연락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
아내는 아기가 곧 나올 것 같다면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담당 의사는 “아직 애가 나오려면 1주일은 더 있어야 합니다”고 말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내 양수가 터지면서 진통이 시작돼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허둥지둥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의 옆에는 큰누님이 종일 지키고 있었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17시간의 긴 진통 끝에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아내는 힘없이 눈을 뜬 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의사는 “매우 건강하고 잘 생긴 아들입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들 희보는 1979년 4월26일 꽃이 만발하는 화창한 봄날 큰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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