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되자 가족들이 제사상 주위에 둘러섰다. 모두 큰절을 했지만 나만 장대처럼 서 있었다. 무릎도 굽히지 않았다. 당시 큰고모는 모 사찰의 보살이었다.
고모가 갑자기 외쳤다. “왜 너는 절을 안하느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을 할 수 없습니다”
고모의 불호령이 아버지에게 떨어졌다.
“집안의 장손을 어떻게 키웠길래 애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 집안 망하게 할 놈이야. 저런 놈은 당장 족보에서 지워버려야 해”
고모는 노발대발했다. 아버지는 난처해하며 내게 소리를 지르셨다.
네 이놈,조상님께 절하지 않으면 당장 족보에서 뺄 것이다. 어서 엎드려 절하지 못 하겠느냐?”
아버지는 이같은 엄포와 함께 나를 빨랫방망이로 마구 때렸다. 나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과 어른들에게는 죄송했지만 내 마음에 간직한 신앙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집을 뛰쳐나와 그 길로 산에 올라 밤새도록 소나무를 붙잡고 껍질이 벗겨지도록 부르짖었다. 그 자리에서 100일 작정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매일 부모님의 얼굴을 그리며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났다. 아버지가 동네 유지이며 독실한 기독인이었던 한 장로님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 그 장로님은 내가 늘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셨다. 장로님은 아버지에게 친절을 베푸셨고 어느날 미국 선교사가 설교하는 전도집회에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버지는 그 장로님을 좇아 집회에 참석했고 집에 돌아오신 뒤 교회 전도사님에게 심방까지 요청했다.
송도교회 담임이었던 이영수 전도사님이 처음 우리집을 방문한 날 첫 예배에서 아버지는 ‘찬미하라 복 주신 구세주 예수’를 부르자고 했다. 이 찬송은 내가 집에 있을 때 자주 불렀던 곡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기억하셨는지 선뜻 제의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울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바로 지금 딱 두번 울었습니다. 도훈(그 당시 부모님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핍박을 많이 했고 족보에서 이름까지 뺄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아이는 강건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는 도훈이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개종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이영수 전도사님은 어머니에게 이같이 말하셨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데 예수님 오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살아서 둥둥 떠올라갈 것입니다. 그때 도훈이 어머니만 땅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말씀에 충격을 받으신 듯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을 만나러 둥둥 떠간다는데 자신만 혼자 남아 발을 동동 구르고 영원한 이별을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밤에 잠을 자다 깰 때에도 그 말이 귓가에 뱅뱅 돌았고 결국 어머니는 교회로 발길을 옮기셨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릴 뿐이다.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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