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 집안 장손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조상을 섬기고 기도하는 일에 열심이었 다. 목포에서 여러 척의 어선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어선들이 출항할 때마다 돼지머리 를 차려놓고 치성을 드렸고 때로는 무당까지 동원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8시만 되면 깨끗하게 목욕하고 흰옷을 입으신 뒤 거실 중앙에 앉아 2시간동안 불경을 읽었 다.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월 초사흘만 되면 유달산 꼭대기 사천왕 동상 앞에 떡 시루를 올려놓고 기도했다.
주위에서 박수만 받고 최고경영자로 승승장구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실패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젊은 나이에 경험이 적은 데다 서울로까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다 낭패를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거듭되는 해상사고(경주호 납북 사건;‘페리호의 반란’ 이란 제목으로 영화로까지 제작됐다)로 가까운 이웃들마저 등을 돌렸다.
한순간에 집안 형편이 뒤바뀌자 우리는 쫓기다시피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목포에 있는 큰 집을 팔아 돈을 보내준다던 친척은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의 은혜를 입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또 다른 친척도 모르는 척했다. 감수성 이 예민했던 고교 시절 나는 극도의 실망감에 빠져 좌절했다. 인생에 대한 회의도 깊 어갔다. 유흥지인 송도에 살 때 나는 늦게까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로 시간을 보냈 고 싸움도 잘해 몇 녀석은 단번에 때려눕히는 싸움쟁이가 되어 갔다. 이런 나를 두고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셨다.
그때쯤 김월득(파라과이 아순시온교회 장로)이라는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석원아,나랑 교회 한번 가자”
“교회는 무슨…”
매일 이어지는 월득이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내 관심은 오로지 예쁜 여학생들을 보는 즐거움뿐이었다. 성도들이 “아멘”하면 나는 장난삼아 “냉면”“자장면”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 선교사의 전도집회에 월득이와 우연히 참석하게 됐다. 집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두 팔을 들고 눈물이 뒤범벅된 채 울고 있었다. “저 사람들 어떻게 된 것 아니야?”
월득이는 “너도 무릎꿇고 진심으로 기도해봐. 언제까지 시간만 낭비할 거야”고 말했다. 월득이가 하는 대로 무릎을 꿇고 묵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졌다. 내가 찬양을 부르고 소리내 기도하고 있었다. 선교사님이 “이 시간에 하나님을 영접하신 분은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십시오”라고 외쳤다. 내가 새로워지는 날 바로 그 순간 생전 처음으로 “아멘”하며 화답했다.
그후 내게 변화가 일어났다.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구원을 얻었다는 놀라운 축복의 소식을 듣고 감격했다. 모든 게 마냥 신기하고 놀라웠다.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매일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1주일에 몇 차례씩 방과 후 교회에 남아 큰 소리로 기도했다. 다른 성도들이 내 기도시간을 피해서 올 정도였다. 이영수 전도사님(현 신부산교회 담임목사)은 내게 ‘기도대장’이라는 별명도 붙여주셨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왔다. 가족과 친지들이 다 모여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해야했다. 제사는 이른 아침에 치러졌다. 나는 전날 밤 철야기도로 무장하고 아침에 절대로 절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회초리를 맞으면 어때. 절대 두렵지 않아’.
추모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십계명의 제2계명에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명하신 것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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