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져 서 있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하나님,제발 우리 선생님 좀 살려주세요. 하나님,살려주세요. 하나님…”
목이 메었다. 택시기사는 정신나간 사람을 보듯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병원에 도착 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쌘뽈학교 여선생님이 실려왔죠. 어디 계세요? 선생님!”
그러자 간호사가 “남편이세요?”라고 짧게 되물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그래요. 쌘뽈학교 여선생님 어디 있어요?”라면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그녀를 찾았다.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산소 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꼼짝 않고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빨리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곧 의식이 돌아올 것입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깨어나봐야 상태를 알 것 같아요”
의사는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을 못 알아볼 수 있어요. 어느 정도 준비는 해두세요”
그렇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감사했다. “저를 못 알아보면 어때요.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선생님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머리숙여 깊게 인사했다.
그녀의 옆에 앉아 기도하며 수십번 찬양을 불렀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천지 지은 주 여호와 너를 도와주시네,너의 발이 실족잖게 주가 깨어 지키며,택한 백성 항상 지켜 길이 보호하시네…”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나를 향해 “고마워요”라며 짧게 말했다. 나는 의식을 되찾은 그녀를 보며 병원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할렐루야,주님이 선생님을 살려주셨어요”
그녀는 후유증 없이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그리고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마귀가 아무래도 우리 사이를 시기한 것 같아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978년 2월 우리는 약혼했다. 그리고 4월22일 꽃이 만발하는 화창한 봄날 모교인 송도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최향숙 입장” 그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옆에 다가섰다. 주례자인 황종은 목사님(소천하심)은 우리에게 “언제나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살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아내는 학창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아내는 CCC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바로 내 친구 김정우(총신대 교수)의 아내였다. 그날 우리는 같은 결혼식에 참석해 축복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친구들의 행복을 빌며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아내는 신부쪽,나는 신랑쪽에 서서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훗날 이 모든 것을 알았을 때 미리 예비해두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다시한번 깊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언 19:14)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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