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5:1-32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2022년 8월 11일 오전 09:31
- e 873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5:1-32
하나님께서 왜 아담의 계보를 다시 기록하고 계신 것일까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회고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누구를 닮은 존재인가? 서야할 자리는 어디인가를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이 혼돈스러울 때에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며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잊어지 말아야합니다. 내 자녀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체적으로는 부모를 닮았으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아담에서 가인이 아니라 아담에서 셋으로 족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계보는 출생순서가 아님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에 800살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로 계속하여 낳고 죽는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생육하고 평균 900살을 살고 번성할지라도 결국은 죽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5장을 “죽음의 족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홍수 이전에 평균 수명이 912세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히 수명이 감소합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120세가 됩니다. 다윗의 시대에 와서는 70-80로 줄어듭니다. 시편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일지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이며 신속히 지나가나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제일 오래 산 사람이 969세 므두셀라이지만 천년을 하루와 같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하루살이도 안됩니다.
죽음은 반드시 잔인하게 임합니다.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죽음의 행렬에 에녹이 등장합니다. 에녹은 당시 수명으로 보아서는 3분의 1 밖에는 안되는 나이에 부름을 받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하늘로 데려 가셨을까요? 900살 넘게 살 것 다 살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더 나을까요? 아니면 365년을 살지라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나을까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다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24절에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 번역한다면 “그를 데려가심으로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입니다. ‘죽었다’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다’입니다. 에녹은 죽음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제외된 사람입니다. 사실 노아도 온 세상이 죽음의 홍수가 임할 때에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끝까지 동행하는 사람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멀고 힘든 길을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면 됩니다.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가면 사망의 골자기를 지날 때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에녹의 삶을 줄이면 ‘하나님과 동행했다’입니다. ‘동행’은 ‘뜻을 맞추어서 길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한 일은 자녀를 낳았다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심판을 앞둔 세상에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심판을 앞둔 세상에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유14-15절)
폐문(閉門)의식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교회들 중에는 주일 오후에 ‘폐문(閉門)의식’을 하는 교회가 있었다. 왕조시대에 왕이 입궁한 후에 했다던 폐문의식은 이해되는데, 교회에서 출입문을 잠그는 의식은 어떤 의미였는가? 좀도둑을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교우들이 모여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공동체에서 교제하며 위로받고 힘을 얻고 ‘흩어진 교회’로 나가라는 파송의 의미였다. 일터와 가정과 지역사회와 국가에서 세상에 영향을 주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세상에 나가 ㅇㅇ교회의 대표선수로 치열하게 분투하다가 주일에 다시 오라는, 성도의 사명과 책임에 관한 의식이었다.
-오늘아침- 유튜브[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