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하기를 구하라
고린도전서14:1-12
바울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먼저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그 모든 은사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바탕 위에서 은사가 사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은사는 풍성했으나 사랑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개인적인 유익만을 생각했습니다. 은사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했을 때에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은사 가운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2-4절에 나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예언은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다른 사람의 덕을 세웁니다. 방언은 기도하는 사람 본인의 신앙을 도움이 되지만 예언은 여러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되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바울이 은사의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느 은사가 교회 공동체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 하는 면으로 볼 때에 방언 보다는 예언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라는 것입니다.(1절)
고린도교회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이고 설립자인 바울은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방언의 남용이었습니다. 공중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바울은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하지 아니하면 허공에다 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과거에 카톨릭의 미사는 라틴어로 드려졌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쉽고 재미있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로 복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상을 사랑하면 알아듣는 말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은사들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따라 그 귀중함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공공연하게 방언만 받는 집회가 있고, 그 곳에 가서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낮은 수준이며 낮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바울이 방언을 금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에배중에 방언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악기가 자기만의 소리를 잃어버리고 다 똑같은 소리만 낸다면 오케스트라의 화음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진군인지 퇴각 인지를 모르니 어찌 전쟁을 하겠는가?(7-8절) 도대체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때부터는 소음입니다. 대화가 잘 되려면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는 공통어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10-11절) 영적 은사를 사모하되 그 목적이 형제를 사랑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 이어야 합니다.(12절)
말이 말씀이 되게
말은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을 때 효력을 발휘하고 말에 책임을 지고자 할 때에 결의가 느껴진다. 혀가 풀려서 제 멋대로 말이 쏟아지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25년 동안 극동방송에서 매일 새벽설교를 하였다. 매일 설교를 하면서 때로는 '말 설사'(diarrhea of words)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할 때를 분별하는 싸움을 매일 치열하게 된다. '말'이 '말씀'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은 목회자에게 주신 특권이지만 큰 시험이 되기도 하다. 말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치유가 되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고,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가 되게 해야 한다. 자신의 믿는 바를 말하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벤전3:16절)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한 영혼을 향한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진실이 담긴 말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오늘아침-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