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임하는 태도
고린도전서11:17-22
본문은 성찬식 때에 일 년에 적어도 몇 번은 보는 말씀입니다. “너희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7.20절) 고린도 교회안에서 행지는 성만찬이 오히려 해롭고 가보아야 먹을 것도 없어서 파행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칭찬할 수 없다고 밝힙니다. 서로가 분열되어 있으니 주님의 만찬을 먹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은 개역성경의 번역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분쟁이 생겼을 때 그 진실함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바울은 이런 분쟁을 통하여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가 드러나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교회안에 파벌과 있어서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서 심지어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주님을 예배하고, 함께 모여 주님의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하심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성만찬을 위하여 준비한 음식으로 자신의 배만 채우고 나중에 온 사람들이 먹을 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20-21절)
지금처럼 주의 만찬이 작은 빵과 포도주를 먹는 방식이었다면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당시 주의 만찬은 식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부자들이 먼저와서 음식을 가져다 먹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노동자들 노예 출신들 노예들.. 이런 분들은 일찍이 올 수가 없어서 늦습니다. 와보면 이미 음식이 다 떨어졌습니다.(21절) 사랑을 나눌 할 거룩한 식탁이 이기심과 무례함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 싫어서 먼저 음식을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을 음식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먹는 것에 대하여 예민하여서 먹는 것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끼리만 아니라 누구와도 어울려서 함께 먹으며 약한 사람, 늦게 온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익숙한 사람들 보다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는 사람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먹기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낯선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2:46절) 교회는 함께 거룩한 떡을 떼는 공동체입니다. 단순히 성만찬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일은 칭찬할 것이 없다고 한 이유는 이것은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힌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해롭다는 것은 “썩는다”는 의미로 예배가 질서를 잃으면 교회는 생명을 잃고 썩게 된다는 의미로서 (17절) 교회의 심장과 같은 예배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교회는 새파랗게 질리게 됩니다.
예배의 끝이 중요하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가 설교라고 말하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면서도 설교를 가지고 에배를 평가하기도 한다. 찬양이 은혜로웠는지 또는 귀에 거슬렸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예배가 자꾸 예배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유행병처럼 번지는 예배 자체를 즐기는 유행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한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순서는 마지막 순간이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예배의 은혜를 간직하고 옷깃을 여미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졸다가 기지개를 펼 시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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