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4) 폰티우스 펠라토스(Pontius Pilatus)
마태복음27:11-26
공회가 사형선고를 내리고 로마 총독에게 사형을 집행 주기를 청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고소한 죄목은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고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기를 “유대인의 왕인가”라고 물으니 “네 말이 옳도다”라고 긍정하셨으나 빌라도의 눈에는 왕이 되려는 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군중도 없고, 군대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종교적인 시기심 때문에 제거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살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총독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이 침묵하고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셨기에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자신을 변명하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한 일이 없는데도 쟁쟁한 변호사에 둘러 싸여서 법정에 들어서는 인물들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빌라도는 이미 2000년 이전에 사망했으나, 지금도 매주 마다 수많은 성도의 입에서 호명되고 있습니다. 원망을 들어야 합니다. 억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제 5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주후 26-36년에 10년간 다스렸는데 4년째 되던 해에 예수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며 묻기도 했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며 유대인들의 기소가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
빌라도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에는 로마 총독의 이름으로 죄인을 사면해 주는 전례가 있음을 알고 당시에 흉악무도한 죄수인 바나바와 예수 중에서 선택하라고 합니다.(17절) 유대 지도자의 조종을 받고 있는 군중들은 뜻밖에도 예수님을 죽이고 바나바를 놓아 달라고 요청합니다.(20-22절) 예수님이 죽으시면, 바라바는 풀려납니다. 당시의 악명 높은 강도의 우두머리가 죽을 운명의 순간에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그가 풀려나고, 죄인들이 풀려나고, 우리 모두가 풀려납니다. 그것이 사실 유월절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군중들은 여론이 밀려서 뒤에서 불러 주는 대로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정치를 하려는 뜻이 있었던 빌라도는 군중의 아우성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씻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줍니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감추고 책임을 미루면서 집행관에게 예수님을 내어 준 ‘폰디우스 필레투스’(본디오 빌라도)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이 오늘 감추고 싶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며 수시로 손을 씻고 있는 모습은 아닌가요? 옳은 것을 알면서도 앞에 있는 이익이나 손해 때문에 진리를 감추고 귀를 막고 있지 않은가? 침묵하시며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합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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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여기서 끝이다. 듣기 좋은 말, 보기에 좋은 것, 편하고 익숙한 사람의 말만 듣는 게 편하지만, 그러면 우리의 내면은 그만큼 작아진다. 첫눈에 보기에 싫어도, 자세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예쁘다. 다 안다고 확정하지 말고, 오래 보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스럽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좀 더 자세히 보았다면, 그 분을 좀 더 오래 보았다면,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만났을 것이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마시라. 메시아를 곁에 두고서도 보지 못했던 그때 사람들처럼, 오늘도 곁에 찾아오신 주님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