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3) 후회를 넘어 회개로
마태복음27:1-10
베드로는 주님을 세 차례에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인했을 때에는 참담하고 수치스러웠으나 통곡하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행동을 그를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다 구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의 순간에도 (14:28-31) 곧 바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며 꾸짖으셨을 때(16:23)에도 창피했지만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스스로 주님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으나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도 어린 여자 아이가 짤막하게 던진 질문도 당해내지 못하고 재빠르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살다보면 고개도 들 수 없을 만큼 주님을 실망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만한 좋은 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부인하기보다는 심문과 박해와 고문과 죽음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후 주님을 부인하는 대신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을 맞선 젊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그런 후배들을 보았다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기나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넘깁니다.(1절) 당시 유다를 책임지고 있는 총독 빌라도에게 자신들이 결정한 사형을 집행 해주기를 요구합니다.(2절) 가룟 유다는 산헤드린 재판이 끝나고 주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3절) 예수께서 공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진 사실을 알게 되자 주님을 판 일을 후회하게 됩니다. 후회와 회개 사이에는 분수령이 있습니다. 산봉우리 근처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처럼 처음에는 꽤 가까이에서 출발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 갈 것입니다. 후회는 분노와 비난과 자기 증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파괴, 죽음의 바다로 이어집니다. 회개는 다시 살아나는 생명 바다로 이어집니다. 바울도 그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참고.고후7:10) 유다에게 배반하라고 누가 강요하거나 유혹한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결정한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도 공모자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고 후회하고 슬퍼하였으나 결국은 절망에 빠지고 자신이 자신을 스스로 사형시킵니다.
유다는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절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내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이 말은 용기가 있어 보이나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는 것을 거부하는 마지막 행동일 뿐입니다. 그런 행동은 캄캄한 흑암에서 영원한 후회를 하게 할 것입니다. 유다는 스스로 뉘우쳐 돈을 다시 반환하려고 제사장들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합니다. 대제사장은 유다에게 '그것은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은 유다와 거래를 한 것이 아니고 유다를 이용한 것 뿐입니다. 이성을 잃은 유다는 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서 은 삼십을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매어 죽습니다.(3-4절) 그의 시체가 밭 위에 떨어지고 창자가 터져 흘러나왔고 피가 땅을 적셨습니다.(행1:18)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살 길이 열립니다. 후회가 되고 수치스럽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미울지라도 거기에 머물지 말고 지금도 사랑하시고 기다리시는 주님께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후일에 이것을 강조하였습니다.(벹후3:9)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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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환자 집합!
나는 신학교 3학년 때에 군에 입대했다. 신병 훈련소에 있을 때에 소대장이 주일에 신자 집합을 시키면서 “기독교 환자 집합” 라고 소리를 칠 때에 불편한 마음 분노의 마음이 교차되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졸병 때에 내무반에서 고참이 공개적으로 술을 따라주며 “고참은 하나님이다”라고 복창을 시기며 마시라고 강요할 때 느낀 분노의 심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많이 구타를 당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너도 저런 예수환자는 아니지? 여기에 있는 사람치고 정말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잖아, 그렇지 않아?" "예수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은 괜찮아도, 지나친 건 좋지 않아, 안그래?" 그런 분위기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전염병으로 인한 비대면 시대에 옆에 있는 상관이 ”자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교회 간다는 말이 나와?“ 이런 빈정거리지 소리를 이기지 못하면 신자 구실 못한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