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을 입으셨습니까
마태복음22:1-14
21장에서 '악한농부의 비유'로 인하여 화가 잔뜩 나 있는 자들에게 또 하나의 비유를 시작하시는데 ...하늘나라는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기독교는 잔치집입니다. 천국도 잔치 집입니다. 교회도 잔치 집입니다. 잔치집은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쁘고 기쁩니다. 잔칫집에는 풍성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먹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던 시절에는 며칠이고 잔치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득실거립니다. 누구라도 먹는데 거절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왕의 아들을 위한 것이니 오랫동안 철저히 준비하고 초청할 사람을 신중하게 선정하고 그들에게 초청장을 만들고 사람들을 직접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했으니 오라고 했으나 다 거절합니다. "싫어하거늘.."(3절) 한 번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거절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짜증을 내고 화를 내었습니다. 초청장을 보냈는데 와야 할 분들이 오지 않으면 섭섭한 것입니다. 왕은 재초청을 하였으나 한결같이 거절하였습니다.(4절)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면 들로 나가고,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장사하러 갔습니다. 일상생활이 바빠서 왕의 초청에 반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교회냐? 예수냐? 라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왕의 자비는 진로로 바뀝니다. 당시는 왕의 초청을 거절하면 왕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일로 인정을 하였기 때문에 왕은 군대를 보내서 왕이 보낸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그 도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7절) 왕이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니 사거리에 가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초청하여 잔치 좌석을 다 채우라고 하니 결국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다 듣고,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그런데 좌석이 가득 찬 연회장에 왕이 등장하는데 왕이 준비하여 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11절)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왕이 예복으로 미리 보내준 옷을 입어야만 하는데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끌려 나올 때에 그는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상상해 봅니다. 왕이 준 예복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을 입고 멋을 부리고 싶었을 것입니다.(사64:6) 마땅히 입고 예복을 입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한 것입니다.
사거리에서 일하던 옷을 벗고 예복을 입으면 잔칫집 주인공이 됩니다. 옷을 입으면 신분이 바뀌어집니다. 옷을 입으면 몸 전체가 보호됩니다. 더러운 데가 가리워집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벌거벗었음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창3:7절)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친히 가죽 옷을 입혀 주시니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만들어 주신 구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떤 누더기를 걸치고 왔을지라도 주님이 주신 예복만 입으면 다 의로운 자로 왕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의의 옷을 입고 나아갈 때에 모든 허물의 가리움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더 자세히 들으시려면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으로 들어오세요
옷장은 터질 것 같은데 입을 옷이 없어!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아트디렉터인 저자 마쓰오 다이코가 쓴 책의 제목이다. 옷장은 터질 것 같은데 입을 옷이 없는 것 같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하여 100일 동안 옷을 사지 않는 결심을 실행하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적은 책이다. 결론은 자신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멋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옷이 아무리 많아져도 항상 입을 옷이 없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옷’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무지에 있었다. 내면의 수요에 따르는 것이 아닌 얄팍한 소비성 만족을 쫓던 ‘행위’에 대해서도 물론 돌아보게 되게 되었다. 새 옷이 주는 효용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소비의 감각으로 채우려 또 새 옷을 사게 되고, 또 입을 옷은 없고의 반복이 계속 된다. 같은 옷을 입어도 주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늘 외출복에만 관심이 기울어 있다가, 새삼 잠옷과 집에서 입는 옷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손만 붙들고 40년 같은 옷을 입고 광야를 걸었던 때에 무엇이 그들을 만족하게 했을까?
-오늘아침-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