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중 한 명이라도 잃지 말라
마태복음18:10-20
작은 자를 돌보는 그들의 수호천사들은 하늘에서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10절) 작은 자를 돌보는 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환영을 받습니다. '작은 자'는 문자 그대로 연약하고 취약한 어린이들입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취약한 사람들입니다. 장애를 지닌 사람들, 만성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나이 든 사람과 몸이 약한 사람들, 더 이상 써먹을 데 없다고 사회가 판단하여 폐기 대상이 된 사람들, 길에서 우리가 피해 간 노숙자들, 우리가 무례하게 대했던 종업원, 리어카에 자기 평생의 소유물을 다 실은 듯 폐비와 재활용품을 잔뜩 쌓고 지나가는 노인도 포함됩니다. 그들을 돌보는 수호천사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얼굴을 가리고 코를 막고 무시하고 지나치고 그들을 부끄러워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십니다. .
주님께서 오신 것은 어린아이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방황하고 있는 어른들도 찾아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방황하던 자를 찾아서 구원하면,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저 하늘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룻 된 길로 나가 방황하는 어른들을 구원하는 것도 기뻐한다면....구원을 받은 어린이에 대해서는 하늘에서 얼마나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는가? 하나님은 "아직 아흔아흡 마리가 있으니까, 무리를 벗어난 그런 어리석은 양은 신경 쓰지 말라 어차피 별 쓸모가 없는 녀석인지도 몰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잃어버린 양은 중요한 녀석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15절)이라 말합니다. 그런 일이 사실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사실이 아니라면 용서가 아니라 오해만 풀면 됩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먼저 가서 당사자를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을 선택하여 가는 것조 좋습니다.(16절) 그렇게 해서 그 형제가 돌아온다면 그 형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한 사람이 거부하면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립니다. 예수님이 염두에 두신 것은 소규모 혹은 셀 단위의 모임입니다. 한번 더 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범죄한 일들을 바로 잡으라고 권고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결국은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상에 속한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야 한다고 하셨습니다.(17절) 오다가다 만나는 일이야 어쩔 수 없으나 더 이상 영적이고 의미 있는 교제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권징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교회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옮기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회복은 회개를 통하여 임하게 됨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목사
유튜브 [박근상목사매일성경]에서 더 자세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냥 용서해 주어라
용서는 자상한 할아버지가 샐쭉해 있는 손자에게 하나쯤 챙겨 줄 수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다. 용서는 오히려 폐의 호흡과도 같다. 폐는 앞서 들이마신 숨을 내쉬어야 또 숨을 들이쉴 수 있다. 그 숨을 내쉬지 않고 계속 참고 있으면 입술은 새파래지고 질식하고 말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용서라는 숨을 내 쉬어야만 다시 숨을 들이 쉴 수가 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우리를 "미안해" 혹은 "용서 할게"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어린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시시한 사람이 아니라는 자세 때문이 아닐까? 몇 번 용서해야 하는가? 이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용서한 것을 세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셨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었는지 아직도 세고 있다면, 사실은 용서한 게 아니라 복수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는 표현은 “세어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그냥 용서해 주어라" 그런 뜻이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