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에 선포하시고 새겨주신 말씀
신명기5:22-3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불과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33절)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 말씀을 온 백성들의 모임인 총회에 전하게 하시고 두 돌판에 새겨서 건네 주셨습니다. 총회란 회의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인 온 회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 자기이 형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알 수 있는 현상만 보여 주셨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또한 하나님과 조금도 격의 없는 아주 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잘 이룰 때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눈이 부시도록 광채가 났습니다. 흑암과 구름과 불 속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빛나는 모습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백성들은 만일 자신들이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불가운데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자신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백성들은 만일 모세에게 말씀하시듯이 자기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자기들은 다 불에 타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25절) “그러니 당신이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그리고 우리에게 전해 주셔서 그러면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행하겠나이다“ 라고 합니다.(27절)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인간인 설교자를 세워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여지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들어야 합니다. 빠짐없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은 바를 백성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40년 동안 백성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들려주는 말씀을 40년 동안 끊임없이 들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신자의 삶이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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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먼드 듣고 전해 달라고 하는데 이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 그 말이 다 옳도다” “그것은 옳은 생각이다”라고 인정 하십니다.(28절) 그러나 “다만”이라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다만”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고 일관되게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순간 감동을 받고 순간 말씀에 대해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말씀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들었으면 “각기 돌아가라”(30절) 하십니다. 가정으로 돌아가라, 직장으로 돌아가라, 사업장으로 돌아가라,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라, 돌아가서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하나님 곁을 떠나지 말고 있으라고 하십니다.(31절) 백성들을 가르치는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기준을 삼아서 좌로나 우로나 기울지 말고 믿은 바를 붙들고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복이 있을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목사
신명기 메시지를 유튜브에 올립니다. [박근상목사 매일성경]
살리는 설교 죽이는 설교
설교는 성경을 잘 정돈해서 발표하는 것도 단순히 성경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를 멋진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이나 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설교는 완전한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설교는 절실한 것이며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다. 설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호소이다. 설교는 지옥에 떨어지려는 영혼을 붙잡아 끌어올리는 것이며 사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나오는 것이다. 죽어 가는 입에 생명수를 넣어 주는 것이다. 설교는 세상에 빠져서 잠자고 있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설교는 구원과 멸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영혼이 생명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설교는 진리 앞에서 갈팡질망하는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것이다. 설교는 예수께 나아와 죄를 버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제 결정하라”는 호소가 없는 설교는 깊이 잠자게 만든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설교자는 반쪽 복음을 전한다.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설교자는 복음을 “자기 수준”에 맞춰서 전한다. 말씀을 오해한 설교자는 오히려 성도를 핍박하고 때린다. 정열이 없이 지식만 전하면 성도를 교만하게 한다. 스데반은 단 한번의 설교를 하고 순교했다. 한 번의 설교는 내 생명의 값과 같이 절실한 것이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