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 입다와 그의 딸
사사기11:29-40
입다는 협상을 통하여 암몬 왕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거절합니다. 긴장감으로 고조되고 입다는 전쟁에 반드시 여겨야 한다는 마음에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큰 부탁을 하려면 자신도 큰 것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만일 암몬을 이기고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집에서 먼저 나와 맞는 것을 번제물로 드릴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입다는 짐승이 먼저 나오면 제물로 드리고 사람이 먼저 나오면 그를 하나님께 드려서 성전에서 일하도록 헌신시키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람을 번제물로 드린다는 뜻이었습니다.(31절) 성경에 소, 양, 염소, 새, 곡식과 같은 제물은 나오지만 사람은 없습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서 사람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던 흔적들이 발견됩니다.(왕하3:26,27)
하나님의 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게 해 줄 것을 믿었다면 그런 무모한 서원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원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서원을 한다면 갚을 마음으로 신중하게 해야됩니다. 서원을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마지막 카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여 하는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입을 함부로 열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오래 기다리게 하시고 침묵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라도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암몬과의 싸움에서 20개의 성을 점령하고 암몬왕은 항복합니다. 만일 입다의 서원이 없었다면 온 이스라엘과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하나님 앞에 승리를 감사하며 큰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는 빛이 나지 않고 입다는 서원의 빚을 갚아야 되는 엄청난 채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다가 승전하고 돌아올 때까지 잊고 있다가 외동딸이 춤을 추면서 아버지를 맞는 것을 보면서 놀랍니다.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큰 옷을 찢으며 “하필이면 왜 너냐” 라며 주저앉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승리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감사도 없습니다. 군사들은 부끄러운 승리를 거둔 것처럼 서로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싸우고 돌아오는 장수가 이같이 슬퍼하는데.. 백성들이 기뻐하겠습니까?
입다의 딸은 오히려 딸이 더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님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이미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하여 주섰습니다." (36절.새번역)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두달 동안 친구들과 실컷 울고 돌아와서 처녀의 몸으로 죽습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손에 죽었는지.. 아버지가 그 딸을 죽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두고 두고 슬픈 기억이 되었습니다.(40절)
만일 이스라엘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입다도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고 딸도 죽지 않았을 것인데...자신들 때문에 입다의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자세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정말 입다의 딸은 제물이 되었나?
입다는 히브리어로 번제를 뜻하는 ‘오라”라는 단어를 쓴다. 성경에는 입다가 그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그는 자기가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라고 되어 있다. 입다가 그의 딸을 불에 태워 제사로 드렸는지 아니면 그의 딸을 하나님께 바쳐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살게 했다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확실한 것은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는 것이다.(37절) 만일에 입다가 그의 딸을 번제로 드렸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입다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셨겠는가?(히11:32)라는 생각도 해본다. 입다는 딸을 보자 자기 옷을 찢었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였다. 자신의 딸을 성전 섬기는 자가 되도록 처녀로 드리는 일이 그렇게 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슬픈 일인가? 친구들이 한 친구가 미혼으로 성전 봉사자로 드려졌다 해서, 두 달 동안이나 함께 울어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스라엘 여자들이 기념일을 정해놓고 나흘씩이나 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남자를 알지 못하고 수절하고 일생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면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집에서 도리어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가 딸을 어떻게 제물로 바쳤을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양을 잡듯이 딸을 칼로 잡아 죽이고 불로 태워 제물로 드렸을까?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문맥은 어떤 죽음이든지 딸을 죽게 한 것으로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