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낌이 없는 양심
사도행전22:30-23:11
천부장은 도대체 바울이 어떤 일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지 자세히 알아보려고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소집하여 바울을 그 앞에 세우게 됩니다.(22:30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고 말합니다. (1절) 자신이 이렇게 수고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떤 신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양심의 자유를 따라서 행동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이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적 존재로 사는데 있습니다.
양심(Conscience)은 라틴어 Com(함께) Scio(내가 안다)의 파생된 언어로 나 자신을 내가 알도록 돕는 내적인 의식(意識)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내 속에 있는 양심, 이 두 가지는 나를 점점 놀라움으로 채운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즉 양심을 버리면 믿음의 배는 조각나고 침몰합니다. 지금 우리의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소리는 주님의 끊임없이 우리를 주드리는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남을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내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초한 것입니다. 신앙양심에 끌려서 양심을 따라서 살아가면 한없이 기쁘며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 하늘처럼 내면이 맑은 사람을 보고 놀랍니다. 양심이 찔리는 사람이 감옥밖에 더 많습니다.
“나는 꺼림낌이 없다”는 말은 대제사장의 자존심을 대단히 건드렸고 그들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합니다.(2절) 제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든지, 고개를 떨구고 죄인의 모습으로 있어야 될 것인데 너무나 당당하고 “나는 조금도 꺼리낌이 없다”라고 말하는 바울을 보니 스스로 화가 나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입을 치라고 명합니다.(22절) 아나니아는 아주 탐욕스러운 인물이었고 친로마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다 듣고 판결해야 할 자가 듣기도 전에 치라고 명하니 바울이 항의 합니다. 바울은 “당신들은 겉으로는 그럴듯하나 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3절) 공회안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격렬하게 논쟁하게 되고 바울은 병영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10절) 그 밤에 “내가 너를 로마에 가게 할 것이다”라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의 인생이 예루살렘에서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길로 가든 간다. 너를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다" 이것을 믿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양심과 본능 사이
사람이 물에 빠져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이 때 '빨리 뛰어들어 구해 줘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물에 뛰어드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생존 본능 사이에 갈등한다. 이럴 때는 생존 본능이 더 강하기 마련이고, 양심의 소리는 모기소리처럼 들릴락 말락하다. 하지만 인간이 참으로 아름다워지려면 그 약한 소리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육신을 지녔기에 잘 먹고, 잘 입고, 건강하게 살아야 행복하다. 참 중요한 평화는 양심에 따라야 갈 때 얻을 수 있다. 식욕, 성욕, 소유욕가 같은 것은 다 좋은 것이지만 단 본능은 반드시 양심이 허락하는 윤리 규범에 따라 조절 되어야 한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