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 축복의삶 나눔 공동체
세상에서 최고의 기적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입니다. 저의 집은 불교 집안이었고, 부모님 모두 불교 및 무속 신앙에 열심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목포에 사시면서 정기 여객선을 운항하셨는데 목포-제주간은 경주호 라는 이름의 정기여객선 이었습니다. 부산-제주간은 덕남호 라는 이름의 정기여객선이었습니다. 또 수 척의 어선들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선들이 나갈 때는 돼지머리를 놓고 치성을 드리고 때로는 무당까지 동원하여 야단 법석 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매일 저녁 8시만 되면 목욕시고 흰옷 입으시고 응접실 중앙에 앉아 약 2시간 불경을 읽으셨습니다. 또한 비가 오나 눈이 나 매달 초사흘만 되면 떡시루를 가지고 유달산 꼭대기 사천왕 동상 앞에 치성을 드린다고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부모님은 사업이 잘되어 부자가 된 것, 그 당시 보기 드문 지프 자가용을 가진 것 모두 부처 때문이라고 생각 하셨습니다. 최고의 경영인(사장)이신 아버지는 나이도 젊고 경험이 적은데다가 서울로까지 사업 확장라는 무리수를 두시므로 어려움이 시작 되었습니다. 거듭된 해상 사고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사상범들에 의해 이북으로 배를 납치해가려던 경주호 납북 사건이었습니다. 이사건은 페리호의 반란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까지 제작 상영되었습니다.
여러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도 당하셔서 사업이 더 어렵게 되어 부산으로 부득불 이사를 가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극에서 극으로 바뀌었다.
당시 아버지의 은혜를 많이 입어 화려한 국회의원 생활을 하던 친척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하기 전 당시 공화당 원내 총무을 했던분도 등을 돌렸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저는 큰 실망에 빠졌습니다. 방황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회의도 깊었습니다.
자살하고 싶었도 머리깍고 중이 되고도 싶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대학에 실패한 후 유흥지인 송도에 살 때 입니다. 저는 늦게까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습니다. 싸움도 잘해서 몇 사람은 단번에 때려 눕히는 싸움쟁이가 되어 갔습니다.
어머니는 장남인 저의미래를 크게 걱정하셨다. 그 당시 아버님이 약국을 하셨는데 자주 약을 사러온 청년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현재 파라과이 아순시온교회 장로입니다. 그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신앙생활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예쁜 여학생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할때 “아멘” 대신에 “냉면, 짜장면”하는 식으로 장난치며 다녔습니다. 어느날 미국 선교사님의 전도 집회에 참석 하였습니다. 그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얻는 놀라운 축복의 소식을 듣고 감격 했습니다. 모든것이 신기하고 놀랍고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부모님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일주일에 몇차례씩 교회에 가서 통성으로 교회가 떠나 가도록 기도 했습니다. 다른분들은 저의 기도시간을 피해 올 정도 였습니다. 목사님들과 전도사님이 저를 ‘기도 대장’이라고 별명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 제사날이 다가왔습니다. 온 가족 친지들이 모였습니다. 모두 제사상 앞에 절을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저는 전날 밤 철야 기도로 무장했습니다. 아침에 드리는 제사에 절을 하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 했습니다. 매를 맞고 야단 맞으면 어때 두렵지 않아. 어떤 야단을 맞더라도 절을 하지 않아야지!
마음속으로 결심을 다졌습니다.
조상에 대한 존경심, 추모심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중 제 2계명에 “내 앞에 다른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명하신 것을 어길 수 없다는 신앙 때문 이었습니다.
시간이되자 가족들이 제삿상 주위에 둘러섰습니다. 모두 큰절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저만 장대처럼 서서 있었습니다. 무릎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큰고모는 어느 절에 보살 이었습니다.
고모가 갑자기 외쳤다. “왜 너는 절을 안하느냐?”
담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절을 할 수 없습니다.”
고모가 고함치면서 말했습니다.
“집안의 장손을 어떻게 키웠길래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
집안 망하게 할 놈이야. 저런 놈은 당장 족보에서 지워버려야 해. !”
고모는 노발 대발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난처해하며 저한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네 이놈, 조상님께 절하지 않으면 당장 족보에서 뺄것이다. 어서 엎드려 절하지 못 하겠느냐?” 아버지께서는 이 같은 엄포와 함께 나를 빨랫 방망이로 때렸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도망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약 그자리에서 맞아 죽었더라면 오늘 여러분들 못 만날번 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어른들에게는 죄송했지만 내 마음에 간직한 신앙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집을 뛰쳐나와 그 길로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소나무를 붙잡고 껍질이 벗겨지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그날 이후 매일 부모님의 영혼 구원을 위해 계속 더 간절히 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동네 유지이며 독실한 신자 이셨던 한 장로님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내가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셨습니다.
장로님은 아버지에게 친절을 베푸셨고 미국 선교사가 설교하는 전도 집회에 함께 가자고 권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장로님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시고 예수님을 영접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집에 돌아오신뒤 목사님께 심방을 요청 했습니다. 당시 목사님께서 병중 이라 전도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머니를 개종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당시 심방오신 전도사님은 어머니께 이같이 말하셨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 다시 오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살아서 둥둥 하늘로 올라 갈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만 예수님안 믿으시니 땅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말씀에 충격을 받으신 듯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예수님 재림 하시면 둥둥 떠간다는데 자신만 혼자 남아 발을 동동 구르고 영원한 이별을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 이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다 깰 때에도 그 말이 귓가에 뱅뱅 돌았고 결국 어머니님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로 나오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하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입니다. 지금은 누나, 여동생, 남동생들 모두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볼때 하나님의은혜 감사할 뿐 입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정 온식구들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갈 수 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웬 말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예수님을 믿도록 온가족을 구원 시켜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부모님을 1991년 미국에 모셔왔습니다. 올랜도에서 함께 4년간 모시고 살았습니다. 당시 동생 가족이 LA 에 살고 있었습니다. LA 방문 해 보시고 너무 좋아 하시는 거예요. 노인들 천국이다. LA로 가서 노인 아파트에서 살면 좋겠다 하셔서 그렇게 해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나성 빌라델피아 한인 장로교회에서 은퇴장로로 어머님은 권사로 섬기셨습니다. 어머님은 새벽마다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 하십니다. 아버님은 지난해 2006년 1월 LA에서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이 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예수님 영접하시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시다가 천국 가셨기 때문에 그 슬픔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변했습니다.
천국 환송 예배시 가족 대표로 인사 할때 입니다. 저는 “아버지 잘 가세요(Good Bye)”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다시 뵙겠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See you again)”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행16:31 에“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 하신 것처럼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릴 뿐 입니다.
이 간증을 듣는분들 가정에 예수님 안믿는 식구들이 있다면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기적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가정 식구들을 전도해야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이 있으시면 위해 기도 하십시요.
저도 오늘 만나신 여러분들과 다시 못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으로 살면 여러분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천국에서 뵐때까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시길 축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다가 앞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식구들을 만나는소망중에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 (293)장소망중에 부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여지지 않도록 만나보자 만나보자 거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 보자 만나 보자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여러분의 생애 최대의 기적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을 것을 감사 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대학 진로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부모님과 의논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장남인 내가 예수님을 믿기전, 얼마만큼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었는지를 다 보셨습니다. 때문에 일반 대학에 가는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사업가가 되거나 정치가가 되는 것을 더 더욱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초신자 이셨지만 장남으로 첫 열매인 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믿음의 결단을 하셨습니다. 신학 대학을 가도록 권유 하셨습니다.
저는 특별 기도를 통해 마음에 결정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진리의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싶었습니다. 젊은이 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신 대학에 입학 하였습니다.
2학년 때 한 채플시간 입니다. 당시 고 홍반식 박사님의 “니고데모의 회심” 이라는 제목의 말씀에 큰 감동과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수업도 참석하지 않고 울며 통회 자복하기를 계속했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지만 그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철저히 내 자신의 성품을 보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불어 넣어 주신 것입이다.
육신의 성품까지 거듭 나도록 회개의 영을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팍 깨져 버렸어요. 왕창 깨진거 예요. 이렇게 팍 깨져버리니 성령이 충만 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목사님께나, 교회에서, 가정에서 골치덩어리 신자 안됩니다. 팍 깨져서 믿기바랍니다. 자아가 왕창 깨져 믿기 바랍니다.
깨진 다음 부터 저의 인생관, 사생관 삶의 철학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가르치겠다는 꿈을 가지고 삶을 온전히 드리기로 결심 했습니다. 이런 변화의 체험이 있은후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부름을 받아간 교회가 부산 충무교회 이어서 서대신교회, 서대신 제일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교회에서는 20명의 학생부가 1년 안에 100명 이상으로 부흥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께 깨지고 철저히 헌신하고 가르쳤더니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이 따르게 하셨습니다.
어느날 학생 하나가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빨리오셔서 어머니 도와달래요. 당시 학생의 어머니는 남편이 3개월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자녀들과 사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가면 안 된다 생각했습니다. 왜요 제가 총각전도사 잖아요. 그래서 교회 권사님 몇 분을 함께 모시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방안에 버젓이 누워 있는데 저를 보고 힐금힐금 올려다 보는데 소름이 끼치 더라구요. 그래서 즉시로 악한 영에 사로 잡혔다는것을 알았습니다.
권사님들께 일으켜 앉히도록 부탁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생 어머니 등 뒤에서 찬송 부르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는 하나님의 딸 에게서 물러갈 찌어다!< 세번 크게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순간 뒤를 획 돌아보는데 소름이 확끼치더라구요. 저를 보는 줄 알았지요. 물끄러미 벽쪽을 쳐다 보더니 뭐라 한줄 아세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아직 나 나갈 시간이 안되었는데...
저는 그때 뭐라카노,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지체 말고 물러 나갈찌어다!! 그 순간입니다. 학생의 어머니는 엉엉 하며 통곡하기 시작 합니다. 회개하기 시작 합니다. 전도사님 용서해 주세요. 이 년이 남편이 죽자 혼자살기도 망막하고 외롭고 그래서 술집에 가서 술마시다 남자 만나고 죄 짓다가 어제 밤 늦게 돌아 오는데 이상 해지더니만 이렇게 됐어요.
예수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실까요? “네 용서해 주십니다.” 다시는 이런 죄 짓지 마세요. 네 전도사님 감사 합니다. 그런데 또 제 손목을 잡으려 해서 권사님들 손 붙 잡으세요. 그 순간을 보니 학생 어머니의 눈동자가 바로 돌아 왔습니다. 입가에 지저분한 것들이 없어졌읍니다. 그리고 얼굴은 겁에질린 검푸른 색깔에서 본래 색깔로 돌아 왔어요. 다음 주일입니다. 교회에 일찍 나와 당시 마루 바닥인 교회를 열심히 닦으며 전도사님 고마웠어요... 하고 웃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악한 영은 틈만 있으면 언제나 넘어 뜨리려 합니다. 그때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명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할 때 귀신이 물러 가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 일 이후 귀신 좇겨 났다는 소문이 나서 학생회는 크게 부흥 하였습니다. 우리가 철저히 주님께 헌신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변화 될 수 있게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래)예수이름으로 마귀는쫓긴다 (2) 예수님이름으로 나아갈 때 누가 우리앞에 서리요 예수이름으로나아갈 때 마귀는 쫓긴다
이렇게 고신대 대학생 시절 열심히 기도하며 헌신적으로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후회 없는 대학시절 이었다. *************************
총신 연구원에 다니며, 충현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잘 생기고 똑똑하고 실력 있는 총각 전도사인 저를(이런것을 자화자찬 이랍니다) 구제 해준다고 교회 권사님들이나 장로님들께서 저의 결혼에 대해 신경을 써 주셨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1학년부터 3학년때도 회장을 했습니다. 임원중 한 사람이 3학년 1학기때 좋은 처녀 구했느냐 물었습니다. 충현교회 아가씨들 많지!! 그러면서 아직 못 구했다면 자기가 소개를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은근히 기대는 걸었습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 이었습니다.
반년쯤 지났을까, 드디어 누군가를 소개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날 오후에 약속이 정해졌습니다.
결혼식 후, 저는 약속 장소를 향해 시간 여유를 두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을 잘못타서 엉뚱한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다시 돌아오느라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그곳에 도착하였다.
저를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막 떠나려는 분위기였습니다. 떠나려는데 늦어서 미안 합니다. 이왕 오셨으니 저에게 시간을 조금 더 내어 주세요, 그러자 그냥 앉더라구요. 저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대화를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인상이 아주 좋더라구요. 늦게와서 속상할턴데 차분하게 그때까지 기다려 준것도 고마웠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또 서로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해서 관심을 가지고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한번은 내가 논산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논산 센뽈여고 영어 선생님 이었습니다. 둘이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앞으로 여러 가지 꿈(Vision)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취 집으로 데려다 주고 저는 근처 여관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 기도 습관 때문인지 일찍 잠을 깼습니다. 다시 잠을 청해도 오지 않았다. 낮에 보아둔 논산 제일 감리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했다. 저의 장래를 위해서 또 최 선생을 위해서 울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런데 기도중 왠지 급한 마음이 들고 최 선생이 사는 자취집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좀 이른 아침 이지만 가 보기로 하고 자취집에 도착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 입니까? 그 집 앞에 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웬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 주인을 찾으며 “이집에 무슨일이 있었습니까? 이집에 사는 쌘뽈학교 여선생님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 여선생 연탄 가스 먹고 죽었나 봐요. 조금전 의식도 없이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어요.” 라고 했습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뛰고 달리고 택시를 타고 해서 실려 갔다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가는 동안 “하나님 제발 최 선생님 좀 살려 주세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나님 ... ”목이 메었다. 택시 기사는 정신 나간 사람을 보듯 힐끔 거리며 쳐다 봤다. 병원에 도착 하지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에 쌘뽈학교 여선생님이 실려 왔다는데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세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것 확인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약혼도 안한 제가 의사는 남편인줄 알았나 봅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대답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응급실로 뛰어 가보니 아직 의식도 없이 산소 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최생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있었습니다. 너무도 기가 막혔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주루룩’ 흘렸습니다.
의사는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 되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뻔 했습니다. 응급 조치는 취했으니 곧 의식은 돌아 올 것입니다. 다행히 생명은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며 말하기를 주저 합니다.. 의사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의사선생님은 생명은 구했지만 깨어 나봐야 다음 상태를 알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을 상실해서 사람을 못 알아 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 준비는 해 두세요.”
그때 저는 그렇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 했습니다.
“저를 못 알아보면 어때요.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최생님을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몇 번이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그 후 저는 최선생님 한테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을 여러번 닦아 주었습니다.
모든 힘을 다해 그녀의 옆에 앉아 기도하며 수십번 찬양을 불렀다.
(노래) “눈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너를 도와 주시네,
너의 발이 실족 잖게 주가 깨어 지키네,
택한 백성 항상 지켜 길이 보호 하시네…”
여러분 이민생활 말에 상처 받고 돈에 상처 받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때가 많습니까? 부부끼리 자녀사이에 속상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이런 말씀을 인용하여 부르는 찬송이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려울때면 이 찬송을 부르곤 합니다.
최선생님 앞에서 계속해서“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은 주 여호와 나도와 주시네.!
부르고 또 부르며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 입니다. 갑자기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희미하게 보이는 나를 향해 “고마워요”라며 짧게 말했습니다.
깨어나도 기억을 잃을까봐 염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되찾고 말까지 하잖아요... 그녀를 보자 저는 병원이 떠나갈듯 환호 했습니다. 주님 감사 합니다. 외쳤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선생은 후유증 없이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뭐라 한줄 아세요. “마귀가 아무래도 우리 사이를 시기한 것 같아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제가 프로 포즈 했지요!!! 최선생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1978년 2월초 우리는 서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고 김희보 목사님의 주례로 약혼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 했고 그해 4월22일 꽃이 만발하는 화창한 봄날 모교인 송도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주례 목사님과 여러 축하객들의 축복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혼 한 후에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선생님 연탄가스 먹었을때 약혼도 결혼도 안한 처지 였잖아요. 그런데요... 만약에 그때 우리가 약혼이나 결혼도 안한 처지에 좀더 이야기 하고 싶다고 늦게 까지 함께 있다가 피곤한 나머지 그 방에서 같이 잠 들었다가 죽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나도 같이 연탄가스 먹고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처녀 총각들이 결혼도 안하고 한방에서 자다니... 더구나 전도사가... 아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 합니다. 큰일 날뻔 했잖아요.
우리가 죽었으면 죽어서도 후회 할뻔 했잖아요.
그런데... 살아서 지금까지 이 자리에 서서 은혜를 나눕니다! 할렐루야!!!
제 아들이 LA에서 내일 장가를 갑니다.
아들한테 그랬습니다. 결혼 하기전에 여자 친구와 함께 잠자면 안된다는 것 알지 아빠 당근 이예요.
고맙다 알았다. 아들만 믿는다.
결혼 전날 어디서 잘건데, 아빠가 머무는 호텔에서 같이 지내자. 아니예요!!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보낼꺼예요.
저는 넥타이만 메고 양복만 입으면 되는데 걸리는 시간10분이면 됩니다. 하하*************************
결혼한 뒤 아내가 서울에서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 할때 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쁜 소식이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어요"
이 말은 온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도 잠시였다. 아내가 배를 움켜쥐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결과가 나오는 날 뜻밖의 소식에 모두 당황했다. “맹장에 문제가 있어서 하루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와 태아 모두가 위험해” 라고 의사 이셨던 이모부가 말해 주셨습니다.
당시 아내는 임신 3개월이었습니다. 단순히 맹장수술만 하는게 아니었습니다 먼저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수술할 때 사용하는 강한 마취제와 항생제 등 약물이 태아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어 어쩌면 장애아가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학교에서 다른 여선생님들로부터 임신중 감기약을 먹고 비정상아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임신중 부주의로 인한 별별 사례를 듣고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선배 목사님과 교수님들에게 상담했지만 특별히 해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확고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첫 아이인데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중절수술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죽이는 살인행위예요. 낙태는 큰 죄에요. 평생 회개 할 일 절대로 할 수 없어요...
아내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하는게 힘들어서 병가를 내고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의 유명한 산부인과는 모두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한결같이 임신중절을 한 뒤 맹장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진실한 기독교 의사를 만나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여동생이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 아동병원에서 수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날짜를 받아 아내는 평안한 마음으로 입원 했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한 후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의사는 맹장을 떼어 냈습니다. 그리고 불순물이 가득 찬 채 곪기 시작한 맹장을 떼어내 제게 보여줬습니다.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몇 번의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긴 아내는 퇴원한 뒤 바로 서울로 올라와 학교에 복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5∼6층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덧 아내의 출산일이 다가왔습니다.
17시간의 긴 진통 끝에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아내는 힘없이 눈을 뜬 채 무엇 했을까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아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두 번 세 번 왜요 건강한 아이로 태어 났는지를 살펴 본것입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사지가 멀쩡하게 태어 났습니다. 할렐루야!
의사는 “매우 건강하고 잘 생긴 아들입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한순간에 잘못 판단하면 잃을 뻔했던 아들 희보는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나 강건하게 잘 자랐습니다. **********************
이 아이 희보 2살 때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니 희보는 2세와 같습니다. 희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 말로 가정예배, 식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한국말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다니면서 영어만 쓰려고 합니다.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제부터 집에서는 어떤 때든지 한국말 안하면 밥을 안준다고 엄포를 놓았니다. 울고 야단 입니다.
그러나 인정 사정 봐주지 않았습니다. 계속 한국말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열매가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후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루는 전화에 아빠!! 고마워요. 고마운 것이 있어요. 뭔데?? 한국말 한국말 할 수 있도록 키워주셔서고마워요. 하더라구요.
지금도 매일 올랜도 시간 밤 10시쯤 꼭 전화가 옵니다. 제가 전화 받아 “아들”하면 아들은 “아빠” 가 우리의 매일의 인사입니다. 장가를 준비하는 아들한테 얼마전에 그랬습니다. 장가 가더라도 엄마 아빠 죽어 천국 갈때까지 매일 전화로라도 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아들은 .. 당근 이지요. 아들이 한국말 할줄 아니 좋고 너무 편해요. 이민 생활하는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국말 계속 사용하게 하도록 하는 것 부모님들의 큰 임무인줄 압니다.
여섯 살때는 확실하게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안에서 성장 했습니다 . 저는 자녀에게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는가를 확인 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는것에 부모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희보는 중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집 근처 닥터 필립스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학생이 4000여명이나 되었으며 미국 플로리다주 전체에서 꽤 유명한 공립학교 였습니다. 해마다 미국내 최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제법 많이 나오는 우수한 학교였습니다.
희보는 이 고등학교의 900여명 졸업생 가운데 여러 과목에서 최고성적과 장학금을 가장 많이받은 학생이었습니다. 고교 4년동안 특수과목 및 AP과목(대학에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과목)을 많이 이수했고 전과목에서 A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졸업생 대표(Valedictorian)가 되어 학생과 가족 등 1만명이 모인 졸업식장에연설하게 됐습니다. 희보의 연설문은 우리 가족의 간증 이었습니다.
다음은 졸업식때의 간증 연설문 입니다.
“18년 전 어머니는 저를 임신한지 3개월 됐을때 맹장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수술 때 쓰는 약들이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임신중절을 권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잠언 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히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라는 말씀을 믿고 임신중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부모님의 신앙 때문에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은 제가 자신의 힘과 판단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복잡하며 내일을 알 수 없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둠을 밝히는 새벽의 빛처럼 여러분을 평안과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분명히 전할 때 축하객 일부는 “할렐루야!”라며 소리쳤고 곧 이어 박수와 함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짧은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졸업식장 에서는 4번이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참으로 ‘행복한 날’ 이었습니다. 감사드릴게 너무 많은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 아들의 생명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명석한 두뇌를 주셔서 1만여명에게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으니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희보는 여러 좋은 대학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았지만 캘리포니아 공대(California Instituteof Technology)에 진학했습니다. 희보가 대학에 입학 하기전 여러 차례 아내와 저는 희보에게 요한3:16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육적으로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하라고 어린 시절부터 그 꿈을 심어주었다.
(노래)"하나님이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멸망치 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희보는 계속 꿈(Vision)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앞으로 과학자로서 인류에 공헌하고 싶다고 합니다. 또 노벨상도 받아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는 꿈을 가지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1달러의 기적을 준비하신 하나님 그리고 플라스로 기적을 계속 허락해 주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간증을 계속 하려고 합니다.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더 배우고 큰 경험을 쌓고 싶었습니다. 당시 충현교회에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줄 테니 공부한 뒤 돌아올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조건들을 모두 포기한 채 사표를 쓰고 ‘고생길’을 택했습니다.
저의 유학 초기에 아내는 밤낮으로 일하며 제 학비를 벌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려운 이민 목회의 여러 과정을 경험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민 첫목회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본교회 담임을 하며 왕복 16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개척을 했습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오고 추웠습니다. 빙판 길에 비끄러져 차가 전복 되고 눈 속에 묻혔어도 우리 하나님 천군 천사로 생명을 붙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간증을 다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군부대가 있는곳에 이중문화 가정의 부인들을 위해 교회 개척도 했습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느부인이 음주와 흡연을 즐기고 많은 날 부부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가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남편과 함께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전도하는 동안 부인들이 처음에는 아저씨하며 이야기를 시작 합니다. 믿고 신앙 생활하면서 그 다음엔 선생님으로 바꿔 불렀습니다. 남편을 따라 다른 부대로 떠날때는 목사님, 사모님 하고 붙잡고 울었습니다. 우리는 같이 울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이 들어가면 변합니다.
여러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전도 하시길 바랍니다.
그곳을 떠나온지 22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지금도 사랑은 계속 됩니다. 그곳에서 개척한 교회 식구중에 아직도 산나물과 고사리를 따서 매년 보내 주시는 성도의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그곳을 떠날 때 황소같이 울며 목사님 떠나지 마세요. 평생 잘 모시 겠습니다. 하신 분도 잊혀지지 아니 합니다.
어느 한국 의사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그 의사선생님은 자신이 암 수술 전문 의사 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장암에 걸려 몇차례 수술을 받으신 분이 있었습니다. 몇차례 수술 후 너무 암이 많이 전이 되어서 더 이상수술 할 수없어 포기하고 죽을 날만 기다렸습니다. 그때까지 친구 의사들한테도 비밀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 친구 부인 한분이 저한테 사정을 이야기 하시고 안믿는 분이니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곳 이었지만 병원으로 찾아 갔습니다. 특별 병실 에는 온방에 꽃으로 가득 했습니다. 제가 찾아가자 이분은 놀랬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 입니다. 저는 목사인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되느냐 물었고 허락 해주었습니다. 간절히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라 했습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영접기도를 따라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할렐루야!)
저는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해주신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 의사 배위에 제 손을 얹고 기도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질병을 일으키는 악한 병마는 물러갈찌어다.
물러 갈찌어다. 기도한후 병 고쳐주신 줄 믿고 감사 만 하세요. 절대 의심치 마세요.아멘 할렐루야!!(삼창) 할렐 루야! 돌아 왔습니다.
그때 병원 밖에서는 그 집식구들이 장례식을 준비 하기 위해 절차를 의논 중이 었습니다. 1개월 안으로 죽는 다나요. 저는 계속 기도 하면서 말씀을 듣고 볼수 있도록 테이프와 성경 공부지를 몇차례 보냈습니다. 1개월 뒤 입니다. 편지가 왔어요. 기도해준 의사였습니다.
아내는 돌아가셨나봐요! 우리는돌아 가셨어도 예수님 영접했으니 천국 가셨겠다 라고 동시에 말했습니다.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체크 한 장과 감사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목사님 감사 합니다.
한평생 교만하던 저, 죄 많은 인생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신 것 감사 합니다. 목사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은 저의 배위에 손을 얹고 기도 하실 때 갑자기 뜨거움을 느꼈고 병마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감을 체험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리고지금은 아무것도 먹을수 없었던 제가 장이 뚫려 죽도 먹고 조금씩 음식 양도 증가하고 체중이 늘었습니다. 운동량도 늘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로부터 4개월 뒤입니다.
그 지역에 한인회 크리스마스 파티 때입니다.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Dr. 장이 살아 돌아 왔다고 .............모두가 놀랬습니다. 그리고 김석원 목사가 기도 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들도 믿고 구할 때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똑같이 일어 날 수있습니다.
(528)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주소서
모든 병을고쳐주마 주 약속 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 주소서 *************************
오하이오주 컬럼버스로 왔습니다.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부하면서 미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 교회는 1985년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유학생들을 몇사람 전도해서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그 지역의 유학생들과 한인 의사와 교수 중심의 교회로 2년만에 250명 정도의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지금부터 20년전 당시에는 비교적 큰 이민 교회였습니다.
그때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모임에 참여한 유학생 중에는 현재 한국 대학생 선교회(KCCC) 대표인 박성민 목사도 있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친후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Seminary) 에 갈 때 추천서를 써 준 일들이 생각 납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 1990년 1월 새해와 함께 올랜도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는 1년후 저는 2년후 올랜도 CCC 본부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CCC 국제 본부에서의 사역은 그야말로 감동의 나날이었다.
창설자 이셨던 브라이트 박사와 함께 사역하면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허락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난 16년동안 CCC 국제 본부 사역중 제 아내 혼자 혹은 저와 함께 여러 나라에 단기 선교를 다녀온 경험과 간증들은 이 시간 다 소개 할 수가 없음이 유감 입니다. 이런 간증은 제 아내가 더 잘 할 것입니다. 또한 국제 본부 50여개 이상의 전문사역들이 있어서 배울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처럼 CCC 국제 본부에서의 사역은 그야말로 감동의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 부지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7.5에이커 넓은 땅에 120피트 높이의 십자가탑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공항도 가깝고 대형 백화점 근처에 있었으며 디즈니랜드 같은 관광지와도 가까웠습니다. 입지 여건이 좋아 모든 면에서 꼭 갖고 싶었습니다.
이 교회는 1981년 문을 닫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 거의 무너져내리고 있었습니다. 걸인과 마약을 하는 사람들의 소굴이었다. 땅은 정글처럼 잡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중개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100만달러에 가까운 돈을 요구했습니다. 도저히 구입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땅 저희에게 주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땅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기숙사도 학교도 짓고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100만 달러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 도와주세요!! 저희들은 계속 기도 했습니다.
이땅을 주시든지, 5년 이라는 선교사 헌신기간도 끝났으니 다른 길을 열어주시든지 해 달라고 계속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갈등만 계속 되었습니다. 갈등하면서 다른 부르심을 기다렸습니다. 큰 교회 청빙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계속 기도하다가 RCA 플로리다 미국 노회에 가입 신청을 했습니다. 서류심사가 끝난 뒤 노회에서 시험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가 1996년 3월7일이었다. 첫날 저녁 미국 노회원들 앞에서 시험에 통과한 뒤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안건 하나가 상정돼 있었습니다. 올랜도에 있는 어느 땅을 오늘 회의에서 결정한 뒤 판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심식사 이후 회의에서 땅 파는 것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순간 ‘올랜도 땅’이라는 소리에 나의 귀가 번쩍 열렸습니다. “올랜도! 올랜도 어디에 있는땅일까?”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도 알리가 없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노회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올랜도 어디에 있는 땅을 파시려는 것입니까” 라며 흥분해서 물었습니다. 회장은 “올랜도 샌드래익근처의 땅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어 또 물었습니다. “땅이 얼마나 크지요?” “7.5에이커 정도 됩니다” 회장이 응답했습니다. 저는 재차 질문했다. “혹시 그 땅에 125피트 이상된 큰 십자가 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회장은 “김목사가 어떻게 그땅에 대해 아시오?”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저 고개만 계속 끄덕이며 “알아요. 제가 아주 잘 압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제 마음에 강한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혹시 저의 꿈을 위해 예비하신 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저는 회장에게 “그 땅 팔지 마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회장은 “김목사 교회에서 그 땅을 살 돈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돈은 없지만 나는 그래도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회장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저는 확신을 갖고 그 땅을 절대 다른 곳에 팔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했습니다. 회장은 “점심식사 뒤 위원회에서 마지막 의논을 하고 그때 결정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점심시간 내내 기도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1년 6개월전에 보고 기도했던 땅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직까지도 그 땅이 팔리지 않았단 말인가!” 드디어 오후 회의가 시작됐습니다. 먼저 땅을 파는 일부터 회의가 진행 됐습니다. 노회원들은 나와 아내에게 “잠시 나가있으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노회의 최종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회장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김석원 목사님 교회에 1달러에 땅을 계약하고 사용권을 드리겠습니다” 결코 꿈은 아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너무 감격해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주위에 있던 모든 미국 교회 노회원들이 “김목사님은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격려했습니다. 들뜬 기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올랜도를 향해 출발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의 자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교육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았기에 기도하게 하심으로 제게 이같은 일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까? 꿈을 이루도록 땅을 주셨으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너무 기쁘고 흥분한 탓인지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잘못 들어서 몇십 마일을 돌았어도 그저 ‘감사' 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처음 그 땅을 보고 기도 한지 1년6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땅에 가서 기도는 했지만 결국 포기 하려 했었습니다. 기억속에서 잊혀지려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교단 가입만 시키고 떠날 준비만을 더 했던것입니다. 그때가 1981년 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중개소는 이 땅을 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981년부터 15년동안 땅을 여러 필지로 나눠서 집을 지어 팔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노회에 참석했고 1만평의 땅을 단 1달러에 받게 된것이다. 할렐루야!
올랜도로 돌아오자 마자 기쁜 마음으로 교회 부지로 향했습니다. 땅에 도착하여 우리는 “할렐루야! 땅에 입을 맞추고 싶더라구요. 하나님 감사 합니다”.
우리는 함께 손을 붙잡고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이 땅 위에 선 아내와 저는 더할 수 없는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미국에 유학 온 것이 1981년 가을이고 이 교회가 문을 닫은 것도 1981년 가을 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이땅을 주실려고 꼭 붙잡아 두신 땅 이라고 여겨졌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 땅을 주시려고 지난 15년동안 저를 여러 모양으로 연단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오랜 시간 땅을 그대로 놓아두셨을까요’ 그때 제가 미국에 온지 15년 이었고 제가 RCA 교단에 가입할 때까지 15년동안 기다리셨던것이라고 저는 믿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고 기적이었습니다.
교회와 선교센터,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를 건축할 수 있도록 땅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이처럼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도록 구별되었던 이 땅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은혜한인 교회가 건축할 세계선교 센타도 이 땅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거룩한 땅이 되게 하셨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어느 날 입니다. 교회잔디를 깎다가 화장실도 사용하고 물도 얻어 마시기 위해 남의 집 신세를 졌습니다. 그때 교회땅 옆에사는 미국인 할아버지가 자기는 이집에 20년 동안 살았다고 소개를 했습니다. 교회와 땅에 대한 역사를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저 한테 물었습니다. “잔디깎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잠간 생각하다가 지금 잔디 깎고 있었으니.. 네 잔디 깍는 사람입니다. 그런데요 잔디깍는 회사 사람은 “아닙니다.
저 목사예요. 선교사입니다. 할아버지는 물었습니다. 앞으로 이땅에 뭐하실려고 합니까? 그때 저는 이곳에 교회를 건축하고 선교센터도 지으려고 합니다” 그때 그 할아버지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쪽 코너 집에 누가 사는 줄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그집에는 15년 전 교회문 닫기 전까지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던 미국인 목사님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목사님 부부가 산다고 귀띔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그 목사님댁으로 향했습니다.
사모님은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 하십니다. “교회 문을 닫은후 15년 동안 황폐해져가는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이 거룩한 땅으로 사용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렇게 김목사님을 만나게 됐군요” 라며 눈물을 닦으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이 집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교회가 들어서기 전까지 임시 예배처소로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가정집에서 주일 예배와 모임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 부지 옆 이 집에서 예배 드리면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새 교회를 건축 할 수 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이 집은 사모님의 딸이 살 계획이라며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망하지 않않습니다.
교회 부지에 올때마다 미국 목사님 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았듯이 돌면서,“ 이 집을 주세요” 라고 계속 기도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이집이 무너지라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집을 우리에게 주시라는 기도 였습니다.
이 일을 계속 하는데 얼마후 갑자기 사모님은 집을 팔겠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왜 집을 파실 생각을 하셨느냐 물었습니다. 머뭇 거리면서 하시며 말씀 하셨습니다. 목사님 어머니가 올랜도 시월드 근처에 사시는 데 갑자기 심장 마비로 돌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어머니가 쓰시던 집으로 이사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집을 살수 있는 기회를 기도 하던 중 응답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어서 사모님께 그럼 딸이 이사 온다는 것은 어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사모님은 딸의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오는 것을 포기 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은 김목사가 이집을 팔려는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첫 번 기회를 준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그 집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크리딧이 적어 대출 받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제 아내 한테 집을 사야 한다고 했더니 돈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돈 있으면 내 놓으래요. 아내는 구체적으로 돈이 어디 있느냐 했습니다. 그때 저는지금까지 우리가 조금씩 부어넣은 은퇴 적금을 찾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은퇴 적립금 조금 모아진 것을 깨서 일부 다운 페이를 하고 집을 사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펄쩍 뛰면서 안된다고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 했습니다. 저의 간곡함에 결국 아내도 제 뜻을 따라 주었습니다 결국 손해를 보면서 은퇴적립금을 찾아 다운패이를 했습니다. 30년 장기로 대출을 받으며 우여 곡절 끝에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입주를 앞두고 있을 때쯤 입니다. RCA 주 총회 책임자가 교회 건축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교회건축 상황을 보면서 앞으로도 60만불-100불 이상이 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포기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께 이야기 했습니다. 사람은 돈으로 계산 해서 교회를 지으려 합니다. 물론 돈이 필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계산법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성전을 완성 하신다고 믿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멘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도 고개를 살래 살래 흔드세요. 그리고 김목사를...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는 교회 짓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집을 하나 구했습니다. 어디요 이땅 한쪽 코너에 있는 과거 목사님 사택 입니다. 이제 새로 구한 집으로 안내 했습니다.
저는 “이 집을 당분간 임시 교회로 사용하고 주일학교 교실로 쓰려고 합니다” 주 총회 관계자는 “그러면 김목사가족은 어디서 삽니까?”라고 물었다. 방 한칸을 사용할 계획이라 하자 미국인들 사고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그때 입니다. 주 총회 관계자는 제 손을 붙잡고 말 했습니다. “김목사님, 제가 총회에 돌아가서 무상원조(grant)를 신청하겠습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고 힘내세요” 그분이 돌아간 뒤 3주후 거짓말처럼 6만달러 수표 한장이 손에 쥐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공짜 돈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주님 일 하려 할 때 공짜 은혜 넘치시길 바랍니다. 교회 건축이 마무리 되어갈 때 의자를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의자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약 5만불 정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돈이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올랜도에서 발행되는 미국 신문을 보게 됐습니다. 한 미국교회에서 쓰던 의자를 기부할 테니 원하는 교회가 있으면 편지로 신청하라는 내용 이었습니다. 그 날 밤 늦게까지 아내와 편지를 쓰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교회로 향했습니다. 교회 문이 열리자 바로 비서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말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임자(First come,first serve)” 아니냐고 하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3주후 연락이 왔습니다. “그날 이후 38개 교회가 신청 했습니다. 김목사님이 첫번째로 편지를 가져오셨는데 내용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의자를 드리지요.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가 새로 지은 교회에 꼭맞는 크기와 숫자의 의자였습니다. 그렇게 튼튼한 의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간증한 것은 성전 짓는 동안 일어났던 기적들의 일부분입니다.
1달러의 기적이란 책에 더 자세히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새 성전은 완공됐다. 2001년1월“올랜도충현교회’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 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아침 일찍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300명석의 교회에 가족과 교인들 모두 8명이 예배를드렸습니다. 이날 오후에는 동시통역으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미국목사님과 미국 노회 교인들과 한인교회 축하객 300여명이 참석해 축복해주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그래서‘김치'라는 명칭의로 선교의 꿈을 이루려 했습니다(KIMCHE·Korean International Mission & Church for Heart Expansion·)의 약자 입니다. 이것은 제가 1세로 미국에 와서 앞으로 오는 모든 한인 세대들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할 꿈이라 여겨졌습니다.
김치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좋아 합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이민 오셔서 10년 이상 되신분들도 김치 없으면 밥못먹겠다고 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요. 김치의 맛.,, 아 따뜻한 김이 모락 모락 나는 흰쌀밥에 김치 함께 먹으면 맵꼼 시콤 달콤한 맛이 있습니다. 때로는 혼자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맛입니다. 이처럼 온세상 사람들에게 한국의 김치 맛처럼 예수 구원,영혼 천국의 김치의 맛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비젼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꿈을 꾸고 함께 이 꿈을 이루실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와 목사님들을 예비 하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는 그 순간부터 가졌던 꿈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보기 드문 축복을 받았습니다.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만이 진정한 축복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무엇이 큰 축복입니까? 세계 선교사 파송 2위 국이 되었습니다. 이시대에 이구촌에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를 주신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 김광신 목사님께서 꿈을 꾸신 비젼과 함께 한기홍 목사님을 모시고 세계 비젼 센타를 완성하여 영적 김치의 맛을 온세상에 전하시길 축원 합니다.
한국 선교사 자녀교육을 위한 선교센터, 미래 은퇴하실 선교사님들의 대책 문제를 해결 해야 합니다. 미래 지구촌의 영적 지도자를 키우는 교육훈련장,치유가 필요한 목회자· 선교사들의 영적 재충전 센터 건립꿈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CCC 국제 본부라는 세계적인 선교단체를 통해서도 계속 기도하게 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비젼을 이루시기 위해 목회를 그만 두고라도 또 다른 부르심과 환경과 현장이 필요 하시다면 순종 할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전 날까지도 교회 강대상 뒤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문득 어려웠던 시절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땅이 생긴 이후 어느날 올랜도 특유의 뜨거운 여름날 이었습니다. 1만평의 잔디를 땀 흘려가며 몇시간을 깎고 또 깎았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잔디 깎으라고 이땅을 주셨나 하는 의문이 들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 잔디 깎는 사람 아니예요.... 아시 잖아요. 올랜도의 무더운 여름날 에는 거의 날마다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한차례씩 내리기 때문에 잔디가 무척 빨리 빨리 자랍니다. 골프장 같은 아름다운 만평의 땅에서 잔디 자라는 소리가 쑥쑥 들릴 정도입니다. 여름에는 거의 매주 마다 잔디를 깎아야 했습니다. 마침 그날도 잔디를 깎으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흘렸습니다. 얼굴은 굴뚝이나 먼지나는 공사판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일군 같았습니다. 땀에 먼지에 범벅이 된 얼굴 이었습니다.
CCC 국제본부 신학교 저의 사무실에 들어가기 위해 대충 땀을 닦고 먼지를 털어낸 뒤에 차에 올라 탔습니다 . 그 당시 CCC 국제 본부는 1마일 이내에 있어서 길만 건너가면 되는 곳 이었습니다. 본부에 들어서기 전 신호를 기다리며 자동차안의 백미러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지저분한 얼굴에 옷까지 초라했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하나님! 애써서 공부시켜 놓으시고, CCC 선교사 헌신 5년만하고 떠날려는 사람 땅 1불에 주시고 꼼짝 못하게 붙드십니까?!!! 이제 잔디 깎는 사람이나 하라고 하십니까?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웃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너털 웃음이라 하지요. 허허허, 하하하 크게 웃다가 하하하 웃는 것이 잘 멈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갑자기 뱃속에서부터 “하하하, 하나님 탱큐가 반복 되었습니다. 멈추어 지지를 않았습니다. 혼자서 배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웃으면서 하나님 탱큐를 외쳤습니다.
CCC 국제본부에 돌아와 몸을 닦는 동안에도 멈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제 사무실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나왔을까요? 왜 하하하 하나님 탱큐 입니까? 방언을 안해본 사람도 아니고 이것은 방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 데살로니가 전서5장 16절부터18절 말씀이 떠올랐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 하라” 라는 말씀 이었다. ‘하하하는 어떨때 나옵니까? 기뻐 웃을때 표현 이라고 여겨 졌습니다
하하하 하나님 했는데‘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대상은 누구 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하나님 탱큐 했는데 탱큐의 영어 표현은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하하 하나님 탱큐 였다고 여겨 졌습니다.
영적 지혜로 말씀과 함께 하하하 하나님 탱큐를 깨닫고 마음에 평화와 안정을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아십니다. 그는 선교사 였습니다. 목회자 였습니다. 가르치는 선생님 요즈음 말로 하면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세가지를 다 성공적으로 감당했습니다. 기적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가 체험하고 영감을 통해 이 성경을 기록했다고 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체험 경지가 꼭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성경 말씀중 평생에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요절 말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은혜로 주신 말씀 붙들고 이 지구촌의 역사와 운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꿈꾸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광신 목사님의 축복의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 들었습니다. “내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요절 말씀의 사람 이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심대로 세계에서 선교사 최고 많이 보내는 은혜 교회를 세워 주신줄 믿습니다.
한국의 백만 성도의 꿈도 꾸시고 입을 넓게 열고 기도 하실 때 한국 은혜 교회에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삽니다.
그때마다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업을 혹은 무슨일 하기전에 항상 기뻐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십시요. 그 일이 기쁨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슨일을 하기전 쉬지 말고 기도 하십시요. 기도가 막히거나 응답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무슨일을 하기전 감사 하십시요. 감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가지 말씀은 사도 바울의 전생애 간증이 되게 했습니다. 기쁨의 신앙, 기쁨의 신학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신앙, 기도의 신학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의 신앙, 감사의 신학의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가지를 통하여 우리는 날마다 간증이 넘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길 축원합니다.(함께) 믿음이 이만 하면 감사도 이만 합니다.(적은데서 크게로 큰데로 작은데로 ) 믿음이 이만 하면 기쁨도 이만 합니다 ********* 그동안 많은 간증도 들으셨고 성도님들도 많은 간증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간증의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 앞에 갈때까지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살전 5:16-17말씀으로 간증의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 앞에 갈때까지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그날이 도적같이 이를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 하라. (노래)항상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반복)
이제 변화된 달라진 모습이 보여 져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하하 하나님 탱큐 해 보십시요. 거울 앞에서도 해보십시요. 사람들 만나면 그러십시오 나는 이제부터 하하하 하나님 탱큐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누구를 만든나든지*****어디서 든지*****어느때 든지 *****무엇이 든지 ***** (다같이) 하하하 하나님 탱큐 한번 밖에 없는 생입니다.
하나님이 영혼 부르셔서 가는 순간에도 기쁨으로 하나님 탱규 하면서 천국 입성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부르시고 자녀를 삼아주셔서 생명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붙들어 주시는 동안 최선을 다할 뿐이다.
“꿈은 가꾸는 자들의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민1세로 미국에 와서 지구촌을 품에 안고 하나님 나라가 온세상에 전파되는 꿈을 꾸며 살아가십시다.
저는 지난해 1달러의 기적 플러스 플러스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1달러의 기적에 이어서 아들을 통해서 플라스(Plus)의 꿈 더하기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미 메스콤을 통해서 보도 되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알고 계십니다. 3개월때 어머니의 신앙으로 임신중절하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 성장 했습니다.
아들이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메카니즘을 발견했다고 메스콤에 비추어 졌습니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논문이 발표되기를 원하는 네이쳐지의 네이쳐 바이올로지 저널에 논문이 실렸던 것입니다. 아들이 기자들과 인터뷰 할때 말한 것을 기억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창녀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현대에 이 지구촌에 계신다면 예수님은 에이즈 환자도 사랑하셔서 치료줄실 것 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에이즈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을 구해 주고 싶어 하는 아들의 꿈이 1달러 기적 이후에 플러스(Plus)의 축복으로 주셨던 하나님께서 그 위에 또 플러스(Plus) 의 기적과 축복을 주실 것으로 믿고 감사 하며 이 간증으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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