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더 큰 경험을 쌓고 싶었다. 당시 충현교회에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줄 테니 공부한 뒤 돌아올 것을 권했지만 그 좋은 조건들을 모두 포기한 채 사표를 쓰고 ‘고생길’을 택했다.
어느 누구든 유학생활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우리 가족에겐 더 힘겨웠다. LA에 도착하면서부터 입학한 ‘고생대학’(인생 전체에서 당하는 고생을 일컬음)은 아직도 졸업을 못했다.
미국에 오자마자 가족과(아내 희보) 헤어졌다. 같이 살 형편이 못돼 나는 학교 기숙사에,아내는 텍사스의 처형댁에 얹혀 지냈다. 기숙사의 음식은 항상 배고팠다. 주말이면 미국인 친구의 차를 얻어타고 햄버거 가게에서 ‘빅맥’ 하나 먹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한번은 너무 배가 고파 한 입에 햄버거를 먹으려다 턱이 빠져 고생한 적도 있었다.
아내는 밤낮으로 일하며 내 학비를 벌었다. 루터라이스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려운 이민 목회의 여러 과정을 경험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혹은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첫 목회지 뉴욕주에서는 본교회 담임을 하며 왕복 280여㎞ 떨어진 곳에 개척을 했다.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이중문화 가정의 부인들을 위한 목회를 시작했다. 음주와 흡연을 즐기고 부부싸움을 일삼던 한 부인은 복음이 들어가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남편과 함께 매주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남편을 따라 다른 지역으로 간 또 다른 부인은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교재를 보내달라고 요청해오기도 했다.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에서 공부하면서도 미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통해 기반을 다져갔다. 이 교회는 1985년 의사와 교수 중심의 교회로 2년만에 중형교회로 성장했다. 그때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모임에 참여한 유학생중에는 현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인 박성민 목사도 있었다.
‘고생대학’안에는 그야말로 힘들고 험하고 억울한 일 투성이였다. 눈보라 치는 밤길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을 운전하고 넘던 일,개척교회에 다닐 때 빙판에 차가 미끄러져 언덕 아래 눈얼음이 덮인 호수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에 차가 멈춘 일,건강보험이 없어 아내와 희보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뿐인가. 오하이오주에서 개척할 때 양식이 떨어져 성도들의 도움으로 겨우 생활했다. 온갖 험한 소리를 들어가며 억울한 일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순간 나와 함께 하셨다.
유학올 때 품고 있던 꿈이 있었다.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학위를 따고 시민권을 얻어 중국으로 선교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공부를 마쳤을 때쯤 이미 한·중수교가 이뤄져 미국 시민권 없이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혹시 하나님의 뜻은 나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가 젊은 일꾼들을 키우게 하시려는 것 아닐까?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모교인 총신대 교수로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10년 후면 선교행정에 지도자가 필요할 거야. 미국 선교단체에 들어가 훈련도 받고 사역을 하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어떠니?”
그 친구가 해답을 주었다. 한국에 가기 전 CCC 국제본부가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이사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때맞춰 올랜도에서 목회의 길이 열렸다.
정리=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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