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거룩 거룩
시편99:1-9
본 시편은 전통적으로 예배를 시작할 때에 부르던 찬양으로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며 부른 찬송,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거룩하시다는 말이 3번 반복합니다. 3절 그는 거룩하시도다(3절)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다.(5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라고 합니다.(9절) 주일 예배찬양으로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삼위일체가 되신 주라”고 부릅니다. 초상집에 가서 실컷 울고서 누가 죽었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예배하면서 누구에게 하는디, 찬송하면서 무엇을 찬송하는지 모르면 안됩니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이며 결코 망령되이 일컬어질 수 없는 거룩하신 이름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그의 반응은 자신의 죄인 됨이었습니다. 예배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말할 때마다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거룩한 성전, 거룩한 거처, 거룩한 팔, 거룩한 기름..어디든지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거룩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너이 신을 벗으라” 고 하셨습니다. 그 땅이 거룩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이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는 거룩하심 앞에서 선 자의 두려움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1절) 우리는 나를 주장하거나 하나님을 조종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광대하시고 민족위에 높다고 하셨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예배를 받으시고 그의 백성을 만나십니다.(2절) 오늘날 나를 성전 삼으시고 부족하고 연약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공의를 견고하게 하시고 공의를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4절)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번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의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깊은 뜻은 다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시키시는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사실은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뭐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수 천년동안 빼앗기기만 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억울한 것이 있으면 접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벌은 바로 내버려둠입니다.(롬1:24.26.28)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불의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일을 행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무서운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죄와 죽음가운데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교회가 소그룹을 강조하고 작은 그룹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예배의 경건이 깨어지고 교제중심의 예배로 바뀌고 성가대가 예배중에 사라지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병이 들고 힘을 잃고 맙니다. 그분이 영광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영감이 있는 예배, 성령의 역사가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6.8절)
그림을 그려주자
나의 자녀가 아버지 무덤 앞에서 어떤 그림을 기억 속에 떠올릴까? 가능한 한 교훈이나 잔소리를 적게 하자. 평범하고 진부한 것들도 가능하면 적게, 비난이나 비평도 적게 하자. 그리고 평생 맘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려주자. 위로받을 만한 마음속의 영상을 만들어 주자. 내가 세상에 없어 마음 따뜻하게 살 것들을 남기자. 추억의 선물만큼 귀한 것은 없다. 특히 특별한 존재들이며,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그림들을 남겨주자... 가을의 수채화 닮은 그런 그림을..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