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도현장에서겪은일 행14장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2023년 7월 20일 오전 08:41
- e 591
전도 현장에서 겪은 일
사도행전14:1-18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핍박을 받고 쫒겨 날 때에 성령이 충만하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는 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이고니온은 고원이지만 넓은 평원을 이루면서 곡창지대라고 할 만큼 비옥한 곳입니다. 오늘날 터키의 5대 도시인 콘(Konya)야라는 곳으로 인구 140만명입니다. 이고니온 회당을 먼저 찾았고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1절) 그런데 또 다른 반응은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2절) 자신 뿐아니라 다른 사람도 선동하여 못믿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오래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자기 은혜의 말씀”(3절)을 증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의 스토리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잘먹고 잘사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에 나에게 베푸신 은혜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만난 9장의 이야기를 전할 때에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함께“(1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3절) 협력하며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을 전도하여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바나바는 회심한 신자들을 잘 양육시키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헐버트 케인(J. Herbert Kane0이라는 선교학자는 “혼자서 선교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이다." 선교는 너무 엄청난 과제이기에 영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이 핍박속에서도 도시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함깨였기 때문입니다.
“도망하여”(6절) 이것은 탈출한 것입니다. 탈출하여 그들이 숨은 것이 아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7절) 루가오니아에 속한 두 성인 루스드라와 데베로 갔습니다. 숨어 있지 않고 거기서 복음을 전합니다.(7절) 그때 바울의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9절) 바울이 무엇을 보았을까요? 설교를 듣는 눈빛과 얼굴을 보면 믿음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침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직 목마른 영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앉은뱅이의 믿음을 보는 순간에 일어나라고 선포합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이 “신들이 사람으로 임하였다”고 하며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은 제우스 신의 대변자인 ‘헤르메스’라고 부르며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려 합니다.(12-13절) 치유의 역사를 본 사람들이 받은 충격이 그만큼 엄청났음을 보여줍니다. 군중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치기를 “우리는 신이 아니다”(15절)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웃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은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나를 구별하는 것이다” 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가당치도 않게 높이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사람이 예배를 받으면 신이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외치기를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분이시니 그분께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15절) 바울은 처음에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주 유연하게 접근을 하였습니다. 전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타 문화권에 들아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힘이듭니다. 바울은 이 기회에 오히려 참된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경을 설교한 개혁자들
요한 칼빈이 불후의 명저인 ‘기독교 강요’를 저술할 때에도 그는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설교했다. 개혁 사상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낸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설교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개혁 사상의 종이 아니라 말씀의 종(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이었다. 진정한 종교개혁은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렸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오늘날 칼빈의 신학적인 유산에 감탄하면서도 칼빈처럼 설교하지는 않는다. 신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목회를 하고,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뛰어난 학자들이어야 하고 뛰어난 설교자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경배의 대상이다. 모든 신학의 시작점은 진리인 성경이어야 하고 신학적인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이어야 한다.
-으늘아침- 유튜브[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