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 앞에 서다
역대상20:1-8
19장과 20장 사이에는 삼하12장이 있습니다. 19장의 다윗과 20장의 다윗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사이에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는 일이 발생했으나 역대상은 이 일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으나 회개하고 회복기에 있는 상태입니다. 역대기에서 그 기록이 지워버린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기에 있는 다윗은 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약해지니 전에는 굴복하고 꼼짝도 못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세 번씩이나 일어나 다윗을 위협합니다. 다윗이 약해지니 잠잠하던 나라들이 다윗뿐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힘겹게 만듭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려움들, 힘들게 하는 블레셋 같은 존재들은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압이 나가서 싸우고 있을 때에 다윗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1절) 상황적으로 보면 다윗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그런 규모의 싸움이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지금 다윗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하가 승리를 거두면 그때 비로소 등장하여 랍바와의 전쟁에서 빼앗은 무려 금 한 달란트의 무게인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고 승리를 누렸습니다. 사람은 높아지고 성공할 때, 나태해지고 게을러지며 또 자기중심적이 되어갑니다. 다윗이 서서히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자리에서 점점 세상의 왕이 되는 자리로 옮겨가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들이 숫자와 크기로, 평가하고 또 그런 것을 힘으로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교회의 규모를 목회자의 가치와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가 누구든지 다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종에 불과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던 그가 주신 은혜를 전리품으로 여기고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영 다윗답지 못합니다. 더구나 사람을 사로잡아 노예로 부려 먹는 것은 제국(帝國)에서난 볼 수 있는 일입니다.(2절)
블레셋은 그 땅의 토박이이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와 요단강을 건너 온 이주민들입니다. 수천년동안 만들어진 문화가 있고 구조가 있습니다. 수천년을 터를 닦은 이 땅에서 단 몇 십년 살아가는 인생이 지금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우상인 풍요와 성공의 신에게 무릎을 꿇고 살기 쉽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좋아 보이는 가치관 유행 문화 쾌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뭔가를 줄 수 있는 것처럼 속여서 점점 미치게 하고 빠지게 하고 중독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블레셋 사람들은 다 거인이었고 기형(奇形)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 홀로 나갈 때에는 거인 앞에 선 것처럼 한 없이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부딧히면 거인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대인 교회가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보다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이 많은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쉬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세상은 악하고 인간은 약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다. 시험에 들만큼 영적으로 약해지지 해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멀리서 팔장을 끼고 계시지 않으신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거듭 확인하게 된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약하다는 것이 진실의 전부라면 해결책은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자'보다 더 강한 분을 붙드는 것 밖에는 없다. '악한 자'가 제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