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가 있느니라
로마서11:1-12
바울은 이방인 전도를 힘써 하면서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심이 생겨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11절) 심판의 순간에도 남은 자를 두셔서 은혜로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5절) 바울은 동족의 운명을 어둡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1절) 답은 “아니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유대교의 골수분자요 핍박 자였던 “나도”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희망은 남아 있다는 겁니다. 엘리야 시대를 예를 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배반하고 떠나는 듯해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듯이 이와 같이 지금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3-4절) 그러므로 바울은 이스라엘에도 선택되어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역설합니다. 우리도 바울에게서 민족의 구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북한에도 하나님은 주체사상에 무릎을 꿇지 않는 '남은 자'가 있다는 희망을 간직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차려 주신 밥상이 그들에게 덫과 올무와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셨습니다.(9절)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그야말로 ‘밥상’을 걷어찬 행위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인 ‘밥상’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거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8절에 첫 단어 “하나님이.....주셨다” 연결해 보세요. 그들이 ‘생명의 떡’을 거절하므로 그 떡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 이방인들이 그 생명의 떡으로 부요하게 된 것입니다.(11-12절) 이스라엘의 ‘밥상’ 거부가 오히려 세상 전체가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귀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복음에 응답할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심을 한없이 감사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우리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한 ‘남은 자’는 누구인가?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가까이에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하여 남은 자들을 모으기를 원하십니다. 가정 안에 아직 불신자들이 우리들의 섬김을 통해 주께 나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영혼을 들을 교회가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바랍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남은 자들’입니다. 이 ‘남은 자’들들은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란 운좋게 살아남은 자가 아니고, 고집이 세서 끝까지 우기고 거기에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남은 자란 것은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황페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에 그루터기니라“(사6;13)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창세전에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심,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심,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롬8;29-30) 은혜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감격하며 남은 자를 향한 열정으로 뜨거워야 합니다. ‘남은 자’는 주님께 돌아올 영혼들이 있음을 믿고 기대를 가지고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난 전해야할 이유인 것입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목사
꼭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더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안된다
두 사람이 해변에서부터 1000km 떨어진 대양 한 가운데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올림픽 수영선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다. 둘 중에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두명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수영선수라도 1000km를 헤엄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수영실력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는 갈 수는 있겠지만, 결국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처럼 물속에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구명 헬리콥터가 그들 위에 나타나 생명 줄을 내려뜨렸다고 가정해보자. 누가 구조되는가? 답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 줄을 잡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구세주를 필요하다. 구원의 줄, 생명의 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