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로 노래하라
시편149:1-9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가운데 하나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에서 찬양할지어다”(1절) 가수가 새노래를 내어 놓으려면 수없이 연습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앨범을 내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도 히트가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런 노래도 얼마가지 않으면 흘러간 노래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는 항상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노래가 새로워졌습니다. 매일 새로운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샘물이 맑은 물을 내듯이 늘 새로운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30년 40년을 부르던 찬양도 오늘도 여전히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찬양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성도의 모입에서 찬양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는 찬양이 클라이막스는 온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가운데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악기를 동원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주를 찬양하라! 우리는 내게 주신 것들을 다 동원하여 찬양합니다. 내 입을 크게 열어서 주께 찬양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법궤가 돌아올 때 다윗이 춤을 추며 찬양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찬양 할 때 그 찬양을 받으시며 찬양을 드리는 그 사람을 주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라고 말합니다.(4절) 하나님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시며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부모가 자기를 인하여 기뻐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 때 그 아이는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볼 때 마다 온 우주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하나님이 웃으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또한 기쁨의 못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찬양을 드리는 것이 천국입니다.
”저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5절) 침상은 잠자리에 드는 장소입니다. 잠을 자면서도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틈타지 못합니다. 깊은 잠 중에 꿈속에서라도 사단이 틈타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침상이 눈물로 젓을 수 밖에 고통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 이제 제 몸을 기꺼이 눕힙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기쁨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게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특별히 억울할 때 입을 열어서 싸우지 마십시오. 욕설 하지 마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돌이켜 찬양으로 바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열방을 보수 하시며 민족을 벌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결박을 풀어주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대로 승리하게 하여 주십니다. 찬양은 사단의 결박을 꺽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베풀어 주시는 영적인 무기입니다. 원수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여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은 해결해 주십니다.(9절) 오늘도 주께 영광을 돌립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목사
유튜브 방송 [박근상목사]에서 더 자세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과연 이데올로기인가?(3)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을 쓴 다니엘 벨(Daniel Bell)은 21세기에 이르러 이데올로기는 종식됐다고 선언했으나, 인간의 욕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한 종식되지 않는다. 물론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파시즘(fascism) 같은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췄으나, 아직도 사회주의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무신론, 진화론, 성평등, ‘동성애 이데올로기(homosexuality ideology)’로 변형되고 있다. 자기 욕망 성취를 위해 의도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화(ideologize)화 하는 일도 일어난다. 소위 ‘목회철학’이니 ‘사명선언문’이라는 고상한 용어로 포장하여 회중들을 야망의 이데올로기의 볼모로 삼고 있다. 회중들은 자신들이 성경적 목표 따라 사명에 충실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세속적인 목회 이데올로기를 추종한다. 그러므로 회중은 그 설교자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들어 보아야 한다. 복음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기독교가 이데올로기로 흘러가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나 로버츠 슐러(Robert Schuller)의 제자들이 ‘3박자 이데올로기’ ‘바라봄의 법칙’ 즉 ‘비전 이데올로기(vision ideology)’를 만들어 교회를 휘저었다. 예수 믿는 목적과 교회의 존재 목적을 ‘비전 성취’를 위한 것으로 둔갑시켰다. 신앙의 목적이 물질적 번영과 성공이라면 그에게 기독교는 이데올로기이다. 성경에서 물질의 번영에 대한 구절들만 뽑아서 성경을 성공의 관점으로만 풀어 간다면 결국은 탐심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된다. 근대화와 함께 경제적 급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에 물질적 번영이 신앙의 목적이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권위주의 혹은 특정한 인간을 절대화가 시키는 것도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위험한 일이다. 기독교안에서 일어나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본질, 오직 복음의 가치만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기독타임즈에 연재한 투고 기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