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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과 고난의 이중주  욥기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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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과 고난의 이중주
 욥기33:1-33
 “욥이여”(1절) 친구들은 욥을 비판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이름을 부르면서 “내 말을 들으라”고 다가 갑니다. 욥이 앞에서 친구들 세 명과 논쟁할 때 했었던 몇 구절을 여기저기서 끌어와서(9.10.11절) 엘리후가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확인하며 반박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감히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2-4절) “당신이나 나나 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냐? 흙으로 지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냐?(6-7절) 지금은 다 망한 욥을 누구든지 와서 툭툭치면서 조롱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가지고 위협하거나 누르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7절)  엘리후는 권세를 가지고 힘을 가지고 누르지 않을 것이니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 받자고합니다. 똑같은 입장에서 한번 마음을 터놓고 한번 대화를 해 보자”고 합니다. 말을 듣기만 하지 말고 대화를 해 보자고 합니다.  

 8-13절까지는 욥이 했던 발언을 주목 주목 지적하면서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말합니다. 욥이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하고 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합니다. 욥이 생각하기를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의 흠을 잡으려고 원수처럼 여기시고 자신의 발목을 붙드시고 내 걸음을 감시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10-11절) 엘리후가 욥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12절)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12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가진 자가 법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람보가 크심이라”(12절) 어떤 인간도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함부로 달려들 수 없습니다.(13절) 지음을 받은 자가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질문을 던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인간의 동의를 구하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대로 모든 일을 행하시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나 꿈에나 밤에 환상을 볼 때에 그 사람의 귀를 경고로써 두렵게 하십니다.(15-16절)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한번이 아니고 거듭거듭 재삼 말씀하십니다.(29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어리석어서 망하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마13장 2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지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보아도 보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쓰시는 것이 18-22절에 보면 질병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에게 질병을 주시고 그리고 질병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를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경을 넘나들 때에 천국과 지옥이 눈앞에서 어른거립니다. 자신의 죄가 생각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세상으로 기울었던 영혼의 실체를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내 육신만 치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도 치료하여 주십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형통을 겸하여 주시고 내일을 모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통할 때에는 기뻐하고 고난의 때에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전7:24) 욥은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항의하였으나 하나님은 이미 욥에게 충분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임한 병이었다고 말합니다.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에서 자세히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답이 없는 시대에 사랑이 답이다
지금 우리는 답 없이 살고 있다. 어디에 물어도 시원하지 않다. 그동안에 공식으로 여겼던 것들을 가지고는 도무지 답을 낼 수가 없다. 삶이란...신앙의 세계란 한 두가지의 공식으로 풀 수 있는 것이아니다. 신앙은 답이 없는 긴 여정을 오로지 주님과 함께 걷는 긴 과정이다. 결론을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공식이 다 깨어졌다. 산다는 것은 참 답답하고 불안할 수 있다. 지금이 그렇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고난의 심연 속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정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성경의 룻도 그렇게 살았고 보아스도 그렇게 살았다. 그들을 부부로 맺어 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이었다. 룻과 보아스는 자신들의 손자가 다윗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또한  다윗을 통하여 이 땅을 구원할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성탄의 사건에  두 사람의 헤세드의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힘들고 어려울 때에 베푼  헤세드의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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