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넘겨주니라
마가복음15:1-15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고발이나 빌라도의 물음에도 침묵하십니다. 공회는 새벽까지 예수님을 죽일 구실을 찾다가 찾지 못합니다. “네가 찬송 받으실의 아들 그리스도냐”(14:61절)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14:62절)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뿐 아니라 이 땅을 심판하실 것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을 빌미로 신성모독 죄를 씌워서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집행권이 없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
예수님을 인도 받은 빌라도가 첫 번째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너희 나라는 어디에 있느냐”(요18:33)라고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 국민이 있고, 군대가 있고, 영토가 있을 것이 아니냐고 겁니다. 그때에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권력인 정치적인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을 끌고 온 사람들이 계속하여 예수님을 고발하자 “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려는가 보라”(4절) 빌라도는 저들이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 왜 침묵만 하고 있는가고 합니다. 예수님을 편들어 주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지만 입을 다무십니다.
“아무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빌라도가 놀랐다”(5절)고 합니다. 이 세상은 뛰어난 웅변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 하는 사람 앞에서 놀랍니다. 세상은 말 잘하는 사람들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서 의를 행하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 의하여 돌아갑니다. 사람은 말문이 막히면 침묵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통할 때에 말을 합니다.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였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 귀로 들었으나 도무지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자 유월절 특별 사면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9절) 물었으나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선동에 비교적 지성적이라고 자부하던 독일 국민들이 감쪽같이 속았고 2차 대전을 일으켰고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나치의 선동꾼 괴벨스(Goebbels)의 말을 들어보라“사람들은 한 번 말한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 번 말하면 의심하게 되고 세 번 말하면 이내 그것을 믿게 된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선동에 속은 개인이나 국민은 스스로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다 유구무언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아 볼 수 없음을 알지만 여론에 밀려서 그들의 소리를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깊은 침묵 가운데 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창조는 침묵과 함께 시작되었다.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침묵 속에 담긴 언어는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의 언어는 깊이가 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생명은 침묵속에서 고요히 자란다. 어린이들은 고요히 자란다. 고요함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중에 꽃이 진다. 침묵은 기다림이다. 과실은 기다림을 통해 맛을 더해 간다. 풋사과는 신선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사과의 깊은 맛은 기다림을 통해 더해 간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듣게 된다. 침묵할 때 감춰져 있는 언어를 듣게 된다. 침묵할 때 마음은 맑아지고, 깊어지고, 부드러워진지고 따뜻해진다. 많이 침묵하라.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