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 옮기기(2)
역대상13:9-14
다윗은 그가 왕이 되고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지휘관 회의를 열고 각 지파마다 사람을 모으고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찾아오기로 합니다. 법궤는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의 앞에 나아갔고 이스라엘이 머물 때에는 성막의 지성소에 머물러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던 기구였습니다. 법궤만 따라가면 사막에서도 길이 열렸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고 사막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때에 법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방치되고 있는 70년동안 예배가 끊어지고 영적으로 침제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이동하기 시작하고 왕과 더불어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함께하였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기돈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갑자기 뛰니 웃사가 손을 뻣어 흔들리는 법궤를 잡자 죽음을 당합니다. 웃사는 법궤가 땅에 떨어지면 안되다는 생각에 거의 반사적으로 법궤를 손을 붙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법궤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레위인데도 급하니까 만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는가? 나름대로 길을 제시하고 열정을 가지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기준뿐입니다. 롬1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예배도 내 흥을 돋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6장에 보면 사람들 앞에서 듣기에 좋은 말로 채우면 사람이 이미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법궤를 수레에 싣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옮길 때에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삼상6장에 보면 법궤가 불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에글론에서 벧세메스로 이동하였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 옮길 때에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옮길 때에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만 합니다. 어깨에 메어서 옮기는 것을 광야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유효한 방법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예외적인 일들이 전통이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사막에는 수레 바퀴가 빠지기 때문에 어깨에 메는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었으나 어디서나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손잡이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파에 속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일단 맡깁니다. 법궤가 자기 집으로 왔을 때에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웃사가 죽은 일을 알고 있기에 몹시 두려워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오벳에돔이 무엇을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며 그냥 법궤를 보관하고만 있었는데도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그냥 모시고 살면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 목사
호랑이와 남매
호랑이와 남매 이야기다. 호랑이가 엄마처럼 하고 와서 잡아먹으려 한다. 남매는 기도하니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 그것을 잡고 올라갔다. 그것을 보고 호랑이도 기도를 한다. 곧 밧줄이 내려왔다. 그것을 잡고 올라가는 도중 줄이 끊어져 결국 죽고 말았다. 둘 다 하늘로 올라가는 줄이다. 나쁜 호랑이에게도 줄이 생겼다. 하나는 진짜였고 하나는 가짜 썩은 줄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결국 매달리자 드러난다. 진리를 말하는 많은 줄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매달려보면 안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