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아나하리나 네가믿느냐 요11장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2월 11일 오전 08:09
- e 120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11:17-37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안치된지 4일이 지났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자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러 나가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장례를 다 치를 때까지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제 장례가 다 끝난 다음에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살릴 것이라고 마지막 날 부활하게 할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마르다는 지금의 부활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 종말론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는 부활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지만 죽음을 통한 이별의 슬픔 앞에서 주님을 보자마자 설움이 복받쳐 마르다는 울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가져다주는 절망감과 술픔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견딜 뿐입니다. 천국 입성이 가장 확실해 보인 스데반의 죽음에 초대교회의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슬퍼하며 울었던 것은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고 살게 해주는 것이지. 그 슬픔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26절에 "이것을 믿는가"라고 하시니 마르다의 입에서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마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습니다. 주님이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셔서 교회의 초석이 된 고백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고백을 마르다의 입을 통해서 듣고 기록합니다. 인간이기에 죽음 앞에 슬퍼할 수 있고, 고난 앞에서 혼들릴 수 있고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스럽고 답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장례식에서 기절할 만큼 슬퍼합니다. 그래도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합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슬퍼하며 눈물이 쏟아지고 있는 그 자리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마르다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교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은 힘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에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이 고백을 붙들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이유가 건물이 작아서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 진실한 고백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엄창난 사람이 모이는 것이나 잘 짜여진 조직이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설교가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는 진실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마태복음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하였다면 요한복음은 슬픔과 절망 중에 있지만 주를 믿었던 마르다의 입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이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집에 들어가십니다. 아직도 사람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심령이 비통히 여기시며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술을 왜 마시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어린 왕자가 술주정뱅이가 살고 있는 별에서 그에게 물었다 “뭐하세요?” “술을 마시지” “술을 왜 마셔요?” “잊기 위해서” “무엇을 잊으려고요?”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어린 왕자는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서 다시 물었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술 마신다는 게 부끄러워” 혹시 술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치는 기도만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아침-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