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lo 74 , 그리고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7월 21일 오후 03:05
- e 86
Explo’74, 그리고
대학 재학 중에 고향 논산제일교회 친구의 소개로 CCC에 대해서 듣게 되고 숙명여대 CCC를 내 발로 찾아가서 성경공부와 기타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이 숙명여대 2학년 때였다.
그러다가 CCC 회관 전체 모임과 기타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점차 정동 채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김준곤 목사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설교에 찐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때로는 눈물로 설교하시는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그분의 나라사랑이 대단하심을 느꼈고, 성경속의 예언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정동회관에서 LTC (Leadership Training Class) 훈련이 있다고 참석하라는 우리 담당 간사님의 권면을 받고 참석하게 되었다. 여러 강사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 하시고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하셔서, 평생 교회를 다닌 셈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 열심히 다녔고, 내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하기도 하며, 주일학교에 안 빠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 따라 저녁예배, 새벽기도, 구역예배 등도 따라다녔던 열심 파였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설교를 많이 들었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도 많이 했지만 구원의 확신은 좀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LTC 참석하면서 예수님의 유일성, 죄 용서받는 방법, 성령충만 받는 방법 등에 대해서 강사님들의 강의(김 안신, 윤 수길, 조 기철간사님 등등)를 들으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구원의 확신도 확실히 얻게 되었다.
그렇게 성경공부, 수련회, 금요 기도회, 금식 수련회 등을 참석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있던 중, 1974년 초부터 Explo’ 74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많은 기도회, 철야기도회, 금식기도회 등이 이어졌다.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훈련시킬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모두 열심히, 정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믿음이 생겼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에는 집에도 못 가고 서울 자취집에서 지내면서 CCC 정동 회관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기도회 참석, 봉투 붙이기, 그 밖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자원봉사자로 섬기면서 수련회 준비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던 중, 김준곤 목사님께서 학생들을 이삼 명씩 짝을 지어 서울시내 여러 교회들로 찾아가라고 하셨다. 찾아가서 목사님들을 만나고 Explo’ 74에 대한 전단지를 드리고, 교회 성도들을 동원시켜 달라는 부탁 말씀을 드리라는 임무를 맡기셨다. 매일 내 짝꿍과 서울 시내 곳곳을 시내버스를 갈아타 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많이 걷기도 하면서, 물어 물어서 교회들을 찾아다닌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어떤 목사님들은 알겠다고 하시면서 수고한다고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우리를 문전박대 하시면서 ‘학생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고 다닌다’고 야단을 치시면서 우리를 박대하셨다. 그럴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더욱이 CCC를 이단 취급할 때는 더욱 속상했다.
때로는 우리 학생들이 여의도광장으로 가서 맨바닥에 앉아서 삼삼오오 통성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한 것들이 생각난다. 한번은 이 재순 언니 랑 기도 짝이 되어서 여의도 콘크리트광장 옆 모래 바닥에 앉아서 기도하는데, 그 언니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던지 여장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Explo’ 74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노량진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순원들과 함께 바닥에서 자면서 낮에는 LTC강의 하고. 저녁에는 모두 걸어서 여의도광장에서 열리는 전체 집회에 참석했다. 가는데 한시간 이상 걸리는 먼 길을 어떻게 걸어서 다녔는지 상상이 안 된다. 그때는 젊어서 그럴 수 있었나 보다. 하루는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메시지를 들었다. 정말 그것을 보는 것 만도 큰 감동이었다.
하루는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통령을 살리기 위해서 영부인이 대신 몸으로 총알을 맞았다고 했다. 8.15 경 축사 행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놀라운 소식이었다.
Explo’ 74 집회는 저녁 집회뿐만 아니라 매일 철야 기도회까지 있었다. 연일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다고 한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100가지도 넘는 기도 제목들을 다 들어주신 그야말로 기적의 시간들이었다!!
김준곤 목사님께서는 1972년도 미국 달라스(Dallas, Texas)에서 열린 Explo’ 72에 다녀오셔서 Explo’ 74의 꿈을 꾸시게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의 Explo’ 74는 김목사님과 CCC 간사님들과 학생들만의 기도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신 많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로 이루어진 집회였다. 대한민국 최고 최 다가 모인 집회 없고 세계 82개국에서 30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한 세계적인 집회였다.
시골뜨기인 내가 친구 소개로 KCCC에 가게 되고 대학 3학년 때 내 일생 최대의 집회를 위해서 수없이 많이 기도하고 또 순장으로 참석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고, 잊히지 않는 경험이었고 특권이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Explo’ 74에 참석한 덕분에 은혜를 받고, 대학 졸업 후, 세상에 나가 일하기전에 먼저 간사로 헌신하여 모교에서 CCC 간사로 섬기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간사로 살면서 그 첫해 간사 수련회 때 모든 간사님들이 설악산 대청봉까지 올라가서(여자 간사들은 중턱의 산장에 머물라고 하셨는데 끝까지 올라간 것) 한밤을 기도하며 대청봉에서 밤을 보낸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대청봉에서 아침에 김목사님이 우리 간사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것(신기하게도 대청봉 꼭대기 바로 밑에서 시원한 샘물이 솔솔 솟아나고 있었다!)과 그 아침에 구름이 저 아래에 깔린 그 산봉우리에서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신 것, 그런데 그 메시지를 레코딩을 못해서 안타까워했던 것 등등 추억이 새롭다.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Explo’ 74로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한 일이나 그 밖에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는 이미 자료가 많이 있을 것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큰 꿈을 꾸시고 여러가지 반대를 무릅쓰고 기도와 헌신으로 이 일을 끝까지 추진하신 김준곤 목사님과 KCCC 간사님들, 그리고 이것을 계속 응원, 후원해주신 Bill Bright박사님과 국제 CCC의 모든 간사님 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의 수많은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 감사드린다! 덕분에 나의 어린 믿음도 더 커진 것을 나는 안다.
Explo’ 74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전도하는 삶을 살기로 헌신했고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그때 그 헌신 때문에 나는 또한 다른 나라로 갈 꿈을 꾸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시골뜨기를 인도하셔서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미국에 가게 하셨다. 미국에서 남편이 공부를 끝낸 후, 나 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목회도 하는 기회도 주셨다.
더욱이 올랜도 플로리다의 국제 CCC 본부(World Headquarters of Cru in Orlando Florida)에서 간사훈련도 받게 해 주시고, 남편이 국제 CCC 신학교 (The Orlando Institute)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게 되어 신학교 학장님(Dr. Steve Clinton)으로부터 9개월 동안 GCTC (Great Commission Training Curriculum) 훈련도 받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려면 그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해서 학장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신 것이다. 요즘도 KCCC 간사님들 만나면 나도 KCCC간사였다고 하면 GCTC 몇 기냐고 묻는다. “저는 무기수입니다. 하지만 국제본부에서 GCTC 훈련은 받았지요.” 라고 대답한다.
국제 CCC가 Explo’ 74를 위해서 많은 재정 지원을 해서 그로 인해 국제 CCC에 큰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국제 CCC 간사님들이 몇 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국제 CCC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재정 담당자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들이다. 또한 그로 인해 빌 브라이트 박사님 (Dr. Bill Bright)께서 어려움을 당하셨다는 이야기도 그곳에서 직접 들었다. 참으로 미안하기도하고 참으로 감사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후에 국제 CCC를 얼마나 많이 축복해 주셨는지도 또한 현장에서 많이 보고 들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국제 CCC에 있으면서 Explo’ 74에 참석했던 간사님들을 직접 만나고 그분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도 정말 귀한 일이었다.
국제 CCC에서 근무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더 기도하게 되었고 세계를 가는 꿈을 꾸고, 기도하며 모금하여, 국제 CCC의 다양한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단기 선교들 중에 예수영화 사역, Macedonia Project (중국 등 복음 전하기 어려운 나라들에 가서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사역), 런던 브릿지 (London Bridges Ministry 즉 런던에서의 노방전도 사역), 좌시 맥도웰 사역 (Josh McDowell Ministry: CCC 국제본부의 수십가지 사역 중 하나)의 오퍼레이션 케어리프트(Operation Care-Lift Ministry 벨라루스,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고아원, 감옥, 학교 등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옷, 신발, 학용품, 외투, 의약품 등을 나누어 주는 사역), Operation Transit Ministry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항구도시 들에서의 노방 전도 사역들)등등의 단기사역들에 참여하며 세계 여러 나라들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는 큰 은혜들을 경험하였다.
목회 현장에서, 국제 CCC에 있으면서, 35년만에 한국에 역 이민하여 대안학교 교장으로 섬길 때도, 지금도 여전히 복음 전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스마일 전도지(www.on-tract.com 간단한 100여개의 언어로 번역된 스토리 텔링 전도지, 올랜도 국제공항에 토요일마다 가서 나누어 준 1장짜리 전도지)를 늘 가지고 다닌다. 물론 4영리도 사용한다.
이 시골뜨기를 사랑하셔서 우리 어머니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 믿게 하시고, 서울로 유학(?)가서 외롭게 신앙생활 하던 내게 고향친구를 통하여 KCCC로 인도해 주시고, 거기서 훈련받아 믿음이 권고해지며 더 구체적으로 복음 전하게 하시고, 국제 CCC까지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을 기도로 품고 직접 전도하러 가게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하하하, 하나님, 탱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