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신학 - 주기도문- 내가 기도할 이유
- 주기도문기도운동
- C 2018년 7월 16일 오후 01:49
- e 1472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대로 신자들에게 기도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먼저 가르침을 받은 자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여기서 필자가 성경에서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언급되고 있는 기도에 관해서 다 구체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은 성경이 한편의 기도의 책 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The King James Versions 인용) 말씀 가운데 모든 사람이 기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66개의 정선된 단어들의 명백한 표현 속에 잠재해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주기도문을 강해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이 지면을 통하여 한국 교회 신자들이 눈을 감지 않고서라도 드릴 수 있는 삶과 일치된 기도의 생활화를 위한 의식화 훈련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전체 공동체인 교회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 훈련을 위해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올바른 기도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담대히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수 없는 것도 터득해야 할 것이다(로마서8:2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 입술의 부르짖음에 동참하시어 말씀을 친히 주신 주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오염과 오류와 불경건함과 바리새적인 태도를 막아 주시는 특권을 감사 하면서 주기도문에 관하여 감히 쓸 수 있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성령님께 의지해 본다.
필자는 본서에서 주기도문에 관한 글들을 본인의 학위 논문을 기초로 성령께서 지혜 주시는 대로 정리했다.
학위 논문 제목은 "The study on content. Manner and attitude of effective petitions for rediscovering of Christian Prayer : Focused on the actual conditions and applications of Christian Prayer of Korean Church in America"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내용, 방법, 태도, 청원에 대한 재조명을 위한 연구 :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접근)이다.
주기도문에 관련된 글을 쓸 수 있게 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본 논문에서 기도의 모범인(Model Prayer) 주기도문 강해(Exposition)를 역사적, 신학적, 주석적 접근을 통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연구 논문 사례는 앙케이트 총 55항목으로 기도 전반에 관한 것과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기도가 현상적으로 신자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주기도문에 관한 글들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말에서 주기도문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를 잠깐 소개한다.
논문 앙케이트에서 주기도문이 성경에 몇 번 기록 됐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중 26.8%만이 정확한 답을 제시 했다. 주기도문을 완전히 외울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 중 83.6%였다.
주기도문이 일반기도 끝부분에 기도 마감 형태로 사용 되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습관적으로 10.4%, 마감 기도로 27.1%, 응답의 확실을 위해서 25.0%로 각각 대답했다. 이런 조사 통계 자료에 의해서 볼 때 주기도문은 예배 마감 형태, 기도 마감 형태로 별 의미 부여나 생각 없이 외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주기도문이 신자들 가운데 자기의 진정한 신앙 고백 없이 드려지고, 이교도의 주문 외우는 것처럼 미신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교인들의 기도 의식 구조 속에서 파악 할 수 있었다.
본인은 주기도문을 예배 시간 중간 설교 전에 온 성도들과 같이 암송 한다. 그 때 마다 우리들의 입술의 죄 됨을 돌아보고 내 인격 전체를 이 기도에 실어 고백하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이 되도록 강조 한다. 혹은 극단적으로 치우쳐 주기도문을 전혀 사용치 않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이 기도를 너무 자주 사용하여 마태복음 6장 8절의 말씀대로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왜곡스러움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