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지 말고 주라
신명기15:1-11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되는 말씀입니다. 이 땅의 현실에는 부유한 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모두가 분배를 받은 땅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에도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형제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난 자와 자지지 못한 자가 생긴 것입니다.재난을 겪든지 흉년을 겪든지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 먹여 살리던 가장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경우 어쩔 수 없이 빚을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갚을 길이 막막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한순간에 채무자로 전락하고 빚을 갚지 못해서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나면 결국은 종으로 팔려가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자식까지 빼앗기는 비극적인 경우를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물질적으로 궁핍함을 겪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꾸어줄 때에 그들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35절) 추수할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곡식의 일부분을 남겨 두라고 하셨습니다. 한쪽 구석을 남겨두고 곡식 이삭을 나그네들이 양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레19장) 땅을 놀릴 때에도 저절로 자라는 곡식은 그냥 놔두고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재판 할 때도 가난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도록 하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출23:10)
우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구원의 빚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중에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가운데 일반 달란트 빚의 탕감을 받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갚고 갚다가 결국은 갚지 못하고 죄값으로 지옥 밑바닥에 떨어져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토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채무였는데 죄를 용서해 주시고 관대하게 대하여 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은 모든 자는 꼭 실천해야 될 하나님의 뜻입니다(4절). “내게 허락하신 대로”(6절)라고 하는 말은 내게 주신 어떤 것이든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만 쓰고 끝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공동체 안에서 빈곤을 몰아낼 수 것입니다.그리하며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4절 후반)고 하십니다. 경제 원리로 볼 때는 미련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이고 손해 보는 일 같고 비경제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는 더욱 더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4.10절)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서있습니다. 나의 이익만을 위하여 인생을 살 것인가?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가? 결정해야 합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 아끼는 마음으로 주지 말 것이라”(10절)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될 때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풍성하심, 하나님의 너그러우심,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통해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웃과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자를 도우며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겠다고 하십시오.
신석장로교회 박근상목사
신명기 말씀을 유튜브로 만날 수 있습니다.[박근상목사매일성경]
아버지를 불러본다
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다..소년의 요구를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고 나무는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다 잘라주고 결국은 그루터기만 남았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해 했다.‘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야기이다. 소년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주고 또 주어 이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나무가 되었다. 먼저 가신 나의 아버지가 그런 분이시다. 그분이 나에게는 그루터기이다. 아버지 나이 보다 열 살을 더 먹은 지금도 그분이 나의 그루터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소년의 이기심이 괘씸해 마구 화가 났었는데 그가 나였다. 지금 늙어가는 소년이 되었다. 떠나신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안쓰럽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던 베드로였다. 독백한다. “주님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오늘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