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고 질서 있게
고린도전서14:13-25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란 초보단계에서 점점 깊어지는 단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옹알이 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이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깊은 교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방언으로 하기 보다는 영으로, 마음으로, 이성으로 나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대화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획일적인 기도의 방법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깨달은 말씀 다섯 마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19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뛰어난 도구인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여 깨달은 말씀 다섯 마디를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나누는 것이 예언입니다.
바울은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에는 반지성적 신비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방언과 같은 신비로운 은사만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반지성적인 신비주의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민족의 말(방언)을 가지고는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21절) 말씀을 전하는 자는 모름지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방언을 말하고 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한다면 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다들 미쳤구나”라고 하며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23절) 이방종교인들이 흥분하여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는 것처럼 ..교회도 그런 것인가? 라고 의문을 품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무아지경속에서 예언하지 않고 감동을 받아서 정상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자기 스스로가 원할 때에 교회의 요청이 있을 때에 절제가 안된다면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철저하게 성령의 통제속에서 은사를 활용해야 성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덕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산만하고, 질서가 없고, 자기 소리만 내고 있고 , 자기가 가진 은사만 자랑하는 곳에 은혜는 떠나가고 무질서만 남게 됩니다.
“품위 있게 질서 있게”(40절) 품위는 그 상황, 그 사람에게 적합하게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여 자신의 것을 자제하고 통제하라는 뜻입니다. 눈높이를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품위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는 사람을 품위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수준으로 맞추어 주신 사건이 십자가 구원사건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품위가 낮아진 것이 아닙니다. 낮추심으로 오히려 높아지셨습니다. 이런 품위를 가져야 교회에도 세상에도 덕이 세워집니다.
바울이 방언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절제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33절) 보이는 세계 속에서의 질서가 중요하듯이 영적인 세계에서의 질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드릴 예배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했다면 그 책임이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합니다.
절실한 예배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우고 추운 겨울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작은 제단을 만들어 놓고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잠시 내려놓은 철모, 두 손에 받쳐 들고 부르는 찬송가, 기름통에 앉아 반주하는 군인, 전쟁통에도 소중히 메고 다녔을 오르간(풍금), 성만찬까지...저들만큼 신령과 진정으로 올려드리는 예배가 또 있을까? 어떻게 오르간을 가지고 다녔는지...병사들의 모습속에서 예배의 간절함을 볼 수 있었다. 저들의 두려움을 경건함으로 가득하다. 누가 생존하고 누가 전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현장에 함께 있던 군종목사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였다. 편한 환경 속에서 습관적인 자세로 때로는 바르지 못한 모습이 부끄럽다. 미국 군종목사가 13명이 희생되었다.
유튜브 [박근상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