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관련설교
 

기도신학영문 개혁주의 (P258-P267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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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김석원목사


부산 고신대 졸업

총신 대학원 졸업

서울 충현교회 부목사(~1981년)

Heritage College (M.R.E., D.R.E. 졸업)

Luther Rice Seminary ( D.Min 졸업)

Westminster Seminary (D.Min Cand)

Call2all / GPN 한어부 세계 책임자 (Representative of KLG )


(현) T.O.I.(C.C.C.국제본부신학대학원) Director of Korean Program,

교수및 Faculty

(현) 올랜도 충현 장로교회 담임목사

(현) RCA 교단 총회장

- 저서

기도의 신학

1달러의 기적 플러스 플러스

- 번역

결혼과 부부스트레스(C.C.C. 총재 저)

전도를 위한 조직(SBC 총재 저)

- 기고

국민일보(나의 길 나의 신앙/15회/02.10.22~11.12)


추 천 의 글


김석원 박사의 저서〈기도의 신학)의, 출판 전 원고를 읽고 우선 그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저자는 총신 대학원을 졸업한 후 수년간 서울 충현교회에 부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다가 미국 유학길을 떠난 지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 그의 학업의 성공과 더불어 그의 귀한 저서를 보게 된 것은, 한때 서로 배우며 가르치던 일이 있던 나로서는 더욱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서는〈주기도문〉을 중심으로 한 기도전반에 관한 신학적이요, 실용적인 저작이다. 어떤 미국 신학자의 말에 아세아의 교회들 중에 일본교회는〈생각하는 교회〉요, 중국 교회는〈노래하는 교회〉요, 한국교회는〈기도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사실 한국 성도들 중에는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많다. 새벽기도는 물론이요, 곳곳에 기도원도 많다. 그러 나 부작용도 점점 많아짐을 본다. 거기에서 불건전한 신비운동이 일어나고 이단이 생겨난다. 참으로 유감이다. 그렇게 되는 것은 기도에 바른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느낀 저자는〈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도의 바른 이해를 밝히려 힘썼다.


본서는〈주기도문)의 단순한 해설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에 있어서, 기도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를 추적했다. 특별히〈주기도문〉에 있어서는 주경학적인 분석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비교하면서 신학적인 분석과 종합을 동시에 시도했다. 그러나 본서는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널리 읽혀져서 한국 교회에 많은 유익이 있기를 삼가 바란다.



1992년 2월10일

김 희 보 목 사

(전 총신 대학 총장)



추 천 의 글


김석원 박사의 '기도의 신학'을 출판하게 된 것을 축하드리며 충현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본 교회의 교역자였었기에 더욱 기쁘게 생각 한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기독교와 기도는 뗄래야 멜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습관에 젖어서 주문을 외우듯이 하며, 유창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외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때에 김석원 박사를 통하여 '주기도문'을 중심하여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로 바른 기도의 자세를 정립하게 됨을 감사드린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거성인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과 요한 웨슬레는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기도생활 속에서 깊은 경건과 참회가 있었다. 그리고 루터는 하루에 3,4시간을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한 종교개혁을 위해 싸웠다. 요한 웨슬레는 매일 3시간 동안의 기도를 통해서 영국을 변화시켰다. 또한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통하여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기도하는 가운데 되어진 기도의 열매인 것이다.

특히 '기도의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중심해서 다루어졌음을 본다. 본서의 중심이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지침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가 있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생명력 있는 호흡" 이며 또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저자도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기도의 신학'을 서술했음을 본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글에서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인간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앉을 때 가장 위대하고 마주하고 엎드릴 때 가장 높아진다."

그러므로 김석원 박사의 '기도의 신학' 이 잠자는 심령을 깨우는 생명력 있는 호흡이 되기를 원한다. 더 큰 바램은 '기도의 신학' 을 통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기도를 배우고 바른 기도를 드리기를 원 한다.


1992년 7월 24일

신 성 종 목 사

(충현 교회 담임)



저 자 의 서 문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기도로 시작하셨고, 십자가상에서 기도로 끝 마치셨습니다. 그 분은 공생애 기간 동안 기독교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기도 생활의 본을 친히 보여 주셨으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주기도문〉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대표적인 모범으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도교" 라고도 하며 기도의 경전인〈주기도문〉을 통하여 가장 완벽한 기도의 방향 제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본인은 학위 논문에서 한국 교회(해외 이민교회 포함) 교인들의 기도 현상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모범적인 기도의 방향 제시는 주기도문을 올바로 드리는 신앙의 자세와 그 정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본서의 서론에서는 주기도의 뜻을 밝히고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취급하여 평신도에게는 개인의 바른 기도생활과 자세를 제시하며, 주기도로부터 출발하는 기도의 주요내용과 그 정신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려 했습니다.

〈기도의 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주기도문의 신학적 해석과 성경적인 이해를 통하여 그 뜻을 명확히 정리하고 실제 적용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 그 시야를 열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목회 일선에서 사역하시는 분들께는 교인들의 기도 현상들을 연구하는 기회를 통하여 목회 사역을 돕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록에서 연구 설문지를 담아 이 글을 내어 놓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는 주기도문의 바른 기도의 자세를 통하여, 일부 무분별한 신비주의적인 기도 운동이나, 혹은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도 생활에서 주님의 바른 기도의 가르침 안으로 돌아오도록 기대하면 서 이 글을 정리 했습니다.


본서에서는 주기도문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 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성경을 많이 인용했고 메시지 형태로 다루었습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자들의 주기도를 해석하는 입장을 동의하면서 다루었습니다.


내용면에 있어서는 주기도문의 서론에 이어서 각 간구마다

1) 각 단 어의 해석,

2) 각 간구의 바른 해석에 대한 방향 제시,

3) 성경적인 기도 의 자세를 간구의 본론에서 다루었고, 그 적용을 언급하고 있으며,

4) 각 간구의 결론에서는 본인의 논문에서 연구 되어진 실제적인 통계를 제시하면서 올바른 주기도를 드리며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세를 촉구 하고,

5) 평신도의 기도 신학에 관하여 더 연구하기를 원하는 분들께는 각 간구의 중요한 부분들의 정리와 기억을 위해 문제 및 토의 사항을 첨가 하였고,

6) 기도 명언 및 기도의 거성들의 기도 명상들을 인용 하였습니다.

본서에서 기도현상 연구대상의 범위가 시간과 경비, 미주 지역 한인교회들의 목회 특성(새벽기도는 대도시를 제외 하고는 거의 실시하지 못하며 철야기도 등이 활발하지 못하므로 설문에 제외됨)때문에 더 폭넓게 연구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쉽게 여기며 차후 더 연구 대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본서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그 잉태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드립니다. 처음부터 끝 까지 기도와 격려로 원고 교정을 도와준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드리며, 마지막 정리와 함께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기까지 그 수고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리며, 이 글을 추천해 주신 고 김희보 목사님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본서 출판을 위해 협력해주신 순 출판사 직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글을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연구하게 하시고 준비 시키시어 쓰게 하셨고 마치게 하셨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GPS (Global Prayer School) Ministry

글로벌 기도학교 사역을 위해 기도해주실 모든 분들을 위하여...



2011년 7월 1일


올랜도 플로리다에서


김 석 원 목 사











차 례

추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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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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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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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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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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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9)

Ⅰ. 첫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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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Ⅱ. 둘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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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 임하옵시며 (마 6:10)

Ⅲ. 셋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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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Ⅳ. 넷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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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1)

Ⅴ. 다섯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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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Ⅵ. 여섯째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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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마 6:13)

Ⅶ. 송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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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부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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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지


들 어 가 는 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The Lord’s Prayer)는 기도의 원형(原型, Prototype)이며 기도 중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The Westminster Shotet Catechchism은 기도로서 완벽한 본보기가 되고 있는 주기도에 대해 이렇게 현명한 교훈을 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 전체가 기도에 있어서 우리를 지도하기에 유익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형식 즉 주기도문은 특별 한 기도의 규칙" 이라고 정의 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주기도문은 "요약된 복음" (The Gospel Abbreviated)이라 칭했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명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이 놀라운 기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규정하신 기도를 드리고 은혜스러운 응답을 기다리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주기도문이라 불리웠던 것은 주님이 직접 하나님께 드린 기도여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태도와 방법 및 기도할 내용을 우리들에게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는 자가 따라야 할 완벽한 본보기로서, 포괄적인 기도의 지침서로서, 주기도문 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 죄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도 산 길이 열려지며, 영육간의 삶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의 측면에서, 최선의 삶,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과 몹시 분주한 산업 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진정한 기도의 시간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들의 주위 환경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조용하게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눌 시간을 잠시라도 갖는 것이 용이치 않다.

하나님과의 교제인 기도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끊임없이 개인과 교회에 대하여 기도를 곡해하는 과오를 범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전적으로 실용주의(實用主義)로 대치되어 왔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린하고 있으며, 바쁘다는 이유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의 자리를 밀어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꼭 응답해 달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기계적이고 의식적이며 형식적이 되어 가는 기도의 그 대표적인 것이 주기도문이라고 본다.

목회를 하는 동안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기도 많이 한다는 신자들 중에 교회에서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생활은 아무렇게나 한다든가 바리새적으로 살아간다든가 하는 경우이다. 기도가 의식화될 때 하나님께 협박인지 공갈인지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이렇게 안 하시면 망신당합니다. 망신당하시겠습니까?"하는 식이다. 이러한 기도자의 기도 태도, 방법, 현상들을 대하면서 필자는 성경이 말하는 성경적인 기도인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 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기도자의 모든 오염된 또는 혼란된 기도를 정화 시키고 주님의 기도관을 올바로 배우고 적용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진정한 내용과 태도와 방법을 찾으려 한다면 주기도문에서 찾아야 하겠고, 거기에서 바른 기도관을 확립하는 기도 생활의 구심점과 접촉점이 만나져야 한다고 본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대로 신자들에게 기도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먼저 가르침을 받은 자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여기서 필자가 성경에서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언급되고 있는 기도에 관해서 다 구체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은 성경이 한편의 기도의 책 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The King James Versions 인용) 말씀 가운데 모든 사람이 기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66개의 정선된 단어들의 명백한 표현 속에 잠재해 있다는데 촛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주기도문을 강해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이 지면을 통하여 한국 교회 신자들이 눈을 감지 않고서라도 드릴 수 있는 삶과 일치된 기도의 생활화를 위한 의식화 훈련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전체 공동체인 교회 속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 훈련을 위해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올바른 기도법을 가르쳐 주시는데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담대히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수 없는 것도 터득해야 할 것이다(로마서8:21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 입술의 부르짖음에 동참하시어 말씀을 친히 주신 주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오염과 오류와 불경건함과 바리새적인 태도를 막아 주시는 특권을 감사 하면서 주기도문에 관하여 감히 쓸 수 있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성령님께 의지해 본다.


필자는 본서에서 주기도문에 관한 글들을 본인의 학위 논문을 기초로 성령께서 지혜 주시는 대로 정리했다.

학위 논문 제목은 "The study on content. Manner and attitude of effective petitions for rediscovering of Christian Prayer : Focused on the actual conditions and applications of Christian Prayer of Korean Church in America"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내용, 방법, 태도, 청원에 대한 재조명을 위한 연구 :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접근)이다.

주기도문에 관련된 글을 쓸 수 있게 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본 논문에서 기도의 모범인(Model Prayer) 주기도문 강해(Exposition)를 역사적, 신학적, 주석적 접근을 통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연구 논문 사례는 앙케이트 총 55항목으로 기도 전반에 관한 것과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기도가 현상적으로 신자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주기도문에 관한 글들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말에서 주기도문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를 잠깐 소개한다. 논문 앙케이트에서 주기도문이 성경에 몇 번 기록 됐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중 26.8%만이 정확한 답을 제시 했다. 주기도문을 완전히 외울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 중 83.6%였다.

주기도문이 일반기도 끝부분에 기도 마감 형태로 사용 되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습관적으로 10.4%, 마감 기도로27.1%, 응답의 확실을 위해서 25.0%로 각각 대답했다. 이런 조사 통계 자료에 의해서 볼 때 주기도문은 예배 마감 형태, 기도 마감 형태로 별 의미 부여나 생각 없이 외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주기도문이 신자들 가운데 자기의 진정한 신앙 고백 없이 드려지고, 이교도의 주문 외우는 것처럼 미신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교인들의 기도 의식 구조 속에서 파악 할 수 있었다.


본인은 주기도문을 예배 시간 중간 설교 전에 온 성도들과 같이 암송 한다. 그 때 마다 우리들의 입술의 죄 됨을 돌아보고 내 인격 전체를 이 기도에 실어 고백하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이 되도록 강조 한다. 혹은 극단적으로 치우쳐 주기도문을 전혀 사용치 않는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이 기도를 너무 자주 사용하여 마태복음 6장8절의 말씀대로 중언부언(重言復言)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왜곡스러움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 한인교회 동부, 서부, 남부, 중북부의 12교회를 선정하여 700여명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주기도문이 기록된 성경은 어느 곳인가? 하는 설문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는 이러했다. 전체 응답자 중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가 41.8%였고, 누가복음에만 기록했다가 3.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했다가 26.8% 이고, 모른다 12.1%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에서 얻어진 결과는 73.2%가 확실히 모르거나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미국내 한인교회 교인들의 실태로 분석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주기도문에 대한 인식과 교육이 무엇인가 새삼 검토 되어져야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설문지의 결과를 보면서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주기도문의 내용과 형태와 위치와 문맥상의 차이들을 고찰해 볼 필요성을 가진다.






1. 주기도문은 신약 성경에 두 가지 다른 형태로 기록 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전혀 본질적인 차이점은 없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9~15절에는 긴 본문 형태의 주기도문이 기록 되어 있고, 누가복음 11:2~4절에는 짧은 형태의 주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넓은 의미에서 문맥상으로 볼 때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서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는 유명한 산상설교 마태복음 5~7장 가운데 기록되고 있다.

반면에 누가의 주기도문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 동안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여행하실 때 있었던 사건들과 교훈들을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행 기사(누가복음 9:51 ~ 19:10)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보다 직접적인 문맥상으로 살펴본다면, 마태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5~15까지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들 가운데 위치해 있다. 이 가르침을 다시 살펴보면, 마태복음 6:5~6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자세와 관련하여 자기의 의를 추구하고 자신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회당과 큰 거리에서 기도 하기를 좋아하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그들과 정반대로,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셨다. 다음 마태복음 6:7~8에서 기도의 형식에 관해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이 기도해야 할 내용을 미리 아시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다.

그리고 마태복음 6:9~13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상반절)라는 말씀과 함께 주기도문을 제자들의 기도의 모델로서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제자들의 마음가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제자들 서로 간의 과실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기도에 대한 교훈을 마치고 이어서 금식에 대한 새로운 주제로 넘어간다.

누가의 주기도문은 누가복음 11:1~13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교훈 중에 나타나고 있다. 누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은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누가복음 11:1~4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 하시는 모습을 본 제자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친 것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절)라고 청원할 때에 이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2절)라는 말씀과 함께 마태복음 경우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기도의 모델로서 제시하였다.

다음 둘째 부분인 누가복음 11 : 5~8에는 기도의 자세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간청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 대한 비유"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6:9~13에는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크게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 나온다.

2. 주기조문의 내용 구분은 기도의 서문과 대상과 송영을 제외하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 부분은 다시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기원 (Thou-Petitions)이다. 이 첫 부분의 세 가지 요소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에는 하나님의 영광 및 그 나라와 계시된 뜻의 승리를 위한 중보기도 (Intercession)와 간구 (Supplication)가 담겨 있다.

둘째 부분은 우리에 대한 기원(We-Petitions)들로써 이룰 다시 세 가지 요소 즉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로 나눌 수 있는데,인간의 필요를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 기원에는 감사(Thanksgiving)가 있고, 죄의 고백(Confession)도 포함되어 있는데, 요청에 앞서 우리의 약함과 죄성이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수대명사 (주기도 속에서 단수 인칭 대명사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에게 죄지은 자……,)가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들 자신의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에 관한 간구와 중보기도로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주기도는 비 이기적인 것을 볼 수 있다.(우리들 대부분은 "나는, 나를, 나의"를 갖고 주님께로 나온다.)





















3. 주기도문은 새로운 경륜 속에서 드려야 할 기도의 본보기 내지는 귀감(Model)으로 우리의 영적 자세를 가르쳐준다.

1) 창조주를 믿는 피조물로서의 자세 ; "하늘에 계신". 창조주만이 하늘에 존재 하신다는 것을 믿는 피조물로서의 진실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비이기적인 자세 ; "우리 아버지여" 복수대명사가 가르치듯이 공동체 속에 자신을 발견하려는 기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3) 아버지에 대한 자녀(子女)로서의 자세 ; "아버지".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자녀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4) 진정한 경배의 대상자로서의 자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오며." 믿는 자녀들의 예배의 대상은 거룩하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서의 자세 ; "나라이 임하 옵시며." 이 기원은 백성된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6) 주인에게 종으로서의 복종의 자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않고 주인 뜻대로 복종하려는 자세가 포함 되어 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을 삶 속에서 신뢰하고 확신하는 자세 ; "오늘날 일용할 양 식을 주옵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항상 채우신다는 확신 속에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8) 순례자의 인생 길에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 하는 자세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인생길 가는 동안 험한 시험이 많은 데, 천국 갈 때까지 시험에서 이기는 승리자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9) 죄인으로 회개하는 자세와 주님을 구주로 믿는 자세 ; "우리가 우 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기도할 때마다 나는 죄인이다. 내 모든 죄악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공로로서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 하나님을 삶에서 전폭적으로 신뢰 하는 자세 ;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세상의 권세와 마귀의 힘은 일시적이고 최후가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11)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승리 할 수 있다는 자세 ;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나님의 권세는 그 능력에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12)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자세 ;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주신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고 충만된 기쁨이며, 그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매일 저녁 세 식구가 가정 예배를 드렸다. 미국에 두 살 때부터 살았던 아들이 한국 충현교회 주일학교 영아부 에서 두 살 때 노래로 배우고 익혔던 주기도문을 곡조 없이 외웠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가끔 주기도문 노래의 마지막 송영 부분만을 노래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때 마다 예배 후 기쁨이 넘치는 웃음의 꽃이 활짝 핀다.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에서 넘쳐흐르는 영적 자세를 통한 은혜가 가정 예배를 더욱 아름답게 해주었다.

하나님만을 신뢰 하는 우리 가정,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온 가정이 승리한 하루, 하나님의 주신 기쁨 안에서 성령 충만을 체험한다.

필자는 자신의「기도의 삶」과「기도의 신학」에 대한 전부는 "인간은 무릎을 끓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앉을 때 가장 위대하고 마주하고 엎드릴 때 가장 높아진다"라는 고백으로 부터 시작하기를 원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는 이 짤막한 주기도문 안에 인간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전부를 다 넣었다. 주기도문을 대할 때 우리는 자주 이 주기도문을 형식적으로 외우고 의식적인 행위에서 그 한계를 넘지 못함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기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언제 어느 때든지 이 주기도를 마음 속 깊이 진실하게 드리므로 감동적인 영적 체험을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 안에서 나누기를 원한다.

개인과 공동체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드린다면 주기도문의 모든 표현과 기원과 논증 속에서 우리는 이 땅 위에 오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 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하여 주신 주기도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주며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기원(Petitions)을 드리고 은혜로운 응답을 기대 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열매인 기쁨을 누리게 할 것이다






















들 어 가 는 말


1. 교부 터툴리안 (Tertullian)은 주기도문에 대하여 무엇이라 칭했는가?



2. 주기도문은 신약 성경 어디 어디에 기록되고 있으며 그 내용과 본 문에서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는가?



3. 주기도문의 내용 구분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4. 주기도문은 기도의 본보기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자세는 무엇인가?



5. 주기도문의 우리에 대한 기원 (We-Petitions) 에서 우리 (We)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기도에 관한 명상


오 주여,우리 눈을 열어 주님을 바로 알며 주님의 권능과 지혜와 공의와 긍휼을 분별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을 넓혀 주님을 우리의 두려움과 사랑과 기쁨과 확신으로 삼아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거룩하게 하도록 하시며, 우리 입술을 열어 주님의 한 없이 선하심을 송축하게 하소서. 오 주여, 그렇습니다. 우리 눈을 열어 주님이 이루신 일에서 주님을 보게 하시며, 우리 뜻을 그 일에 나타나도록 주님의 이름을 향한 존경으로 채우고 또 그것을 받으셔서 우리가 그 뜻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펼 때 주님을 경배 하게 하소서 (퍼킨스, W. Perkins)


첫째 간구 (The First Petition)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서론(Introduction)과 함께 서문(Preface)인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에 이어서 기도의 대상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 관하여 다루었다.

주기도문은 서문을 제외하고 기도 그 자체(the prayer itself)는, 1. 기도의 대상,2. 간구들,3. 결론으로 3구분 되어 있다. 기도의 원형(Prototype)이며 기도 중의 기도라 할 수 있는 주기도문의 간구들은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첫번째 간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 6장 9절)라고 시작 한다. 주기도문의 간구들(Petitions)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 할수 있는 데 각 부분은 다시 세 요소로 나누어진다. 처음 세 가지 간구들은 하나님께 관계된 기원(Thou-Petitions)이고 다음의 세 가지는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관심사와 관계되므로 우리에 대한 기원(We-Petitions)이라 할 수 있다.

첫번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개역 성경 마태 6장 9절에 번역했는데 누가복음에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록하고 있다. 헬라어 성경 누가복음 원문에는(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라고 기록되었고, 영어성경 K. J. V. 에는 "Hallowed be thy name" 이라 번역했다.

라틴어 성경에는 "Sancitificetur nomen tuum"로 "당신의 이름이 성결되게 하옵시며(Sanctified be thy name)"라고 기록 되었고,요한 칼빈 선생은 "기도하옵는 것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may thy name be sanctified)"이라고 번역 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해 즉, 하나님의 실재와 이름과의 관계성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첫째:제한론적 (制限論的) 이해

하나님은 그 이름에 제한되어 계신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이름이 계신 곳에 반드시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이름이 실재다"라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반드시 신의 임재를 끌어 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임재를 필연적으로 끌어 들이고자 할 때 이교도적 혹은 주술적(呪術的) 사고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유명론적 (唯名論的) 이해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뿐이고 하나님의 실재와는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 이름은 단순히 신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 형식으로써 신의 이름은 신 자신의 이름이 아니고 신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구조 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인식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방식을 인간 이해 속에 언어로 주신 것 뿐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단지 이름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문제가 될 수 있고 올바른 것이 아니다. 분명히 성경은 "너는 너의 하 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출애굽기 20장 7절)"고 말씀 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 이름이 하나님의 실재와 직접적인 연관 을 맺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공존론적 (共存論的) 이해

하나님의 그 이름과 실재는 사실상 무관하지만 이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주적 공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름이 그 실재는 아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있는 곳에 계실 수도 있고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다고 해도 사실상 하나님 자신의 실재에는 아무런 영향 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기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 : 7)"고 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무엇이라 했는가? "죄 없다 하지 아니 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출 3:14)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이론과 이해 (제한론적,유명론적,공존론적)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인간의 제한된 어떤 이론과 이해는 인간 자신의 죄악의 바벨탑을 쌓는 교만이고 그 죄악은 인간 자 신을 해롭게 할 뿐이다.




2. 하나님의 각 이름들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 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첫째 : 창세기 서두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나타난다.

1) 엘(El) : 엘(El)은 하나님을 지시하신 단순한 명칭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고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大主宰)가 되신다. 강한 능력을 가진(Almighty)통치자 이시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 주로 복합어로 사용 된다.

2) 엘로힘(Elohim) : 엘로힘(Elohim)의 하나님은 강하고 유력한 자, 즉 자기를 경외의 유일한 대상으로 가르치고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주로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으로 그의 일반적인 면을 지시한다.

하나님이 자기 창조, 권능, 능력을 나타내실 때 마다「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창조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게 하셨다.

3) 엘 엘리욘(El-Elyon) : 엘 엘리욘(El-Elyon)이라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The Most High God)이라고 표현했다. (시 9 : 2, 민 24 : 16, 사 14 : 14)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분은 피조물 된 인간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이시다.

4) 엘 샤다이(El-Shadai) : 엘 샤다이(El-Shadai)라고 불리워 지는 하나님은 출 6 : 3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고"라고 말씀 하셨다. "엘 샤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축복과 위로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5) 엘 올람(El-Olam) : 엘 올람(El-Olam)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 21 : 33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 하시는 하나님 (The Everlasting God)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라고 기록 되었다. "엘 올람"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하나님」이라는 명칭의 표현의 다양성은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 라는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하며 생활에 적용을 준다.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하게 하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가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살아 드려야 함을 확인케 하신다.


엘(El)혹은 엘로힘(Elohim)의 하나님은 그 분의 창조, 능력,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 창조적인 삶, 죄악에서 승리하여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하신다.


엘 엘리욘(El-Elyou)의 하나님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경배의 대상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매 순간 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 지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의 연속을 원하신다.

엘 샤다이(El-Shadai)의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과 위로와 안위의 근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고난 많은 땅에서 그분의 위로를 기다리며 사는 삶("이름이"라고 기도 할 때)올 원하신다.


엘 올람(El-Olam)의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영원한 삶 ("이름이"라 고 기도할 때)에 현 주소를 두고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둘째 : 구약성경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여호와" 라는 명칭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하나님」이라는 명칭과 교차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여호와」라는 명칭은「하나님」이란 명칭처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필자는 시편 23편을 무척 좋아 하는데,그 이유는「여호와」그 분의 이름을 통해서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적 7대 명칭 (Compound Jehovah Title)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여호와 라하(Jehovah-Raah) : 여호와 라하(Jehovah-Raah)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다.

시편 23 : 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기록한다.「여호와」는 우리 삶의 나그네 인생길에 목자가 되신다.

「목자」는 양의 삶을 돌보아 주듯이 목자되신 여호와는 우리의 삶 ("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돌보아 주신다.


2)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 여호와 이레(Jehovah-Jireh)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이다.

시편 23 : 1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I shall not want)는 말씀은 창세기 22 : 14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대신 한 마리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시므로「여호와 이레」의 여호와로 나타나고 있다.「여호와 이레」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 삶에서 그의 백성들이 믿음의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 주심의 은혜로운 삶 ("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체험하게 한다.


3)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 : 여호와 샬롬 (Jehovah-Shalom)이라 불리우는 여호와는「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이다.

시편 23 : 2에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라고 평화의 주이신 여호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사기 6 : 24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라고 기록한다.

「여호와샬롬」이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쌓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삶에 평안을 영위할 수 있다.「평화」는 화평(peace)라는 말로 신약성경 산상수훈에서 팔복 중에 하나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Children)"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화평을 구하는 자에게 자녀로서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 ("이름이"라고 기 도할 때)이 있게 하신다.


4)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 여호와 라파(Jehovah-Rapha)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여호와는 치료자」라는 뜻이다.

시편 23 : 3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He restoreth my soul)라고 영혼을 치료하시어 새롭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 15 : 26 "----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면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는 병 고침의 근원자이신 여호와이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때문에「여호와」를 부를 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죄악과 질병에서 고침받는 삶 ("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된다.


5) 여호와 지드케누(Jehovah-tsedegenu) : 여호와 지드케누(Jehovah-tsedegenu) 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여호와는 우리의 의 (義)」라는 뜻이다.

시 23 : 2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라고 우리의 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례미야 23 : 6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불의한 죄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의(義)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의(義)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義)의 자녀로서 거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하신다.


6) 여호와 삼마(Jehovah-Sammah) : 여호와 삼마(Jehovah-Sammah)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여호와는 거기 계시는 분」,「같이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시편 23 : 4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겔 48 : 35에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라 하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호와와 함께 거한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거하시 기 위해 마태 1 : 23 말씀대로「임마누엘」(God with us)로 오셨고, 요한 15 : 7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 하시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삶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 나라 천국에 거할 때까지 그 분과 동행하는 삶 ("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한다.


7)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 여호와 닛시(Jehovah-Nissi)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여호와는 승리, 깃발」이라는 뜻이다.

시편 23 : 5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씀처럼 원수 마귀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케 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신다.

출애굽기 17 : 15 말씀에는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ᅳᅳᅳ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적군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승리」가 되셨던 여호와는 오늘 세상의 많은 원수 마귀가 적군 아말렉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줄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승리의 깃발」되시는 여호와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원수 마귀와 싸워 날마다 승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 할 때)을 살아야 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 : 9)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 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대표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름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고 사용해야 한다는 중요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마틴 루터는 "이 땅에서 최고로 많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 주기도문이고 그보다 더 희생 당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며, 주기도문에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1. 신약 성경에서「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는 하나님이시다(He is God).


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가?

그의 사역에서 자연을 다스리시고, 사망을 정복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율법을 완성하시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하나님 이신 이 진리에 대해서는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을 곧 하나님 이시니라" (요 1:1) 라고 기록 했고,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음에 대하여,"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요 1:14)고 말씀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도성인신(道成人身-Incarnation)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신 자신을 기도의 대상으로 포함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들은 어떻게 표현 되는가?


생명의 떡, 생수, 길, 진리, 생명, 부활, 선한 목자, 하나님의 어린 양, 골짜기의 백합화, 문 둥으로 표현 되었다.

구약성경 이사야 9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에 관해 제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 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이름들을 열거 하고 있다. 즉 기묘자(奇妙者, Wonderful) 모사(講士,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The Prince of Peace) 둥으로 기록 한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 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표현한 이름들에 대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 4장 30절에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며 표적과 기사(奇事)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의 기록처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선포 되는 곳에 오늘날도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록 믿음으로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주기도문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성경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라고 기록되었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전할 때이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면서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삶의 현장에서의 고난도 기뻐 할 수 있다.

사도행전 5장 4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과 환난 당하는 우리의 삶이 있을지라도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삶의 기쁨이 넘친다.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진정한 주기도를 드릴 때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


다같이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은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에 대하여 이사야서 6 : 3 에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라고 기록한다. 인생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구원 받은 이후의 성도의 삶은 그 거룩하심이 계속 드러나야 한다. 이것을 구원 얻은 성도들의 성화(聖化-Sanctification)라고 한다. 어떻게 거룩하심이 계속 드러날 수 있는가? 주기도를 통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드러난다.

기도할 때 마다 주문이나 독백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기도할 때 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삶을 살도록 마음에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진정한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사는 삶은 무엇이며(What), 어떻게(How) 사는 것인가?


1)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삶이다.

출애굽기 20 : 7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계명은 언급하고 있다. "망령되이"란 말의 히브리 성경을 영어 성경에서는 헛되다(Vanity)로 번역 한 곳이 있다. 이 뜻은 허탄, 무익, 허사, 허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망령되이』라는 말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 여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미 없이 허탈하게 불성실하게 불러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남용 되거나 오용되거나 악이용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분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도록 그대로 묵인하시지 않으신다. 마태복음 12 : 36-37에서는 "사람이 무슨 유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상대방을 저주 하는 욕설에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이름이 섞여 사용되는 것을 흔히 듣는다. 매우 잘못된 일이다. 미국에서 교육 받고 자라는 신자의 자녀들도 화가 나면 함부로 그런 욕설을 사용 하는 것을 본다. 큰일 날 일이다. 우리는 어떤 때 짐승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주기도문의 진정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망령되지 않는 입술의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을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2)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시편 45 : 11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 할지어다."

요한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 배할지니라"라는 말씀처럼 예배는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그 요소 가운데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 하신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은 참된 예배를 드릴 때이다.


3) 그의 이름으로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렘 17 : 22)라고 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대신에 들어온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주의 날 (The Lord's day)이라 불리워진다.(계 1 : 10)

우리는 이 날에 엄숙한 태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할 때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을 살아갈 수 있다.



























결 론



필자가 쓴 논문에서, 주기도문을 드릴 때의 신자들의 자세를 알아보기 위하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자세를 갖는가? 라는 질문지를 냈었는데, 72.5%가 예(그렇다)라고 대답했고, 3.9%는 아니오, 10.7%는 가끔, 12.9%는 모른다고 했다. 이 수치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주기도문에 대한 정신과 기도의식 구조 현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분석해 본다. 즉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자의 삶은 대다수가 그 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또한 그의 이름에 영광되도록 살아가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 교회의 앞날을 밝게 한다고 본다.

그러나 10명 중에 한명 혹은 두 명은 형식적인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한명이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헛되게, 욕되게, 신앙 생활할 때 예수 믿는 모든 신자가 욕을 들을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앞으로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첫 째 간 구



1.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해는 몇 가지 견해가 있으며 자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2. 하나님의 각 이름들은 어떤 것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가?


3. 구약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되고 있는 "여호와" 명칭들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요청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누구인가?


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6.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주기도문을 드릴 때 어떻게(How), 어떤 삶(What)의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가?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들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기도에 관한 명상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경륜을 통해 세상에 더욱 더 드러나며 퍼지기를, 주님의 말씀이 달리고 달려서 죄인들의 회심과 성화에서 영화롭게 되기를, 주님의 모든 백성이 더욱 거룩해지기를,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 모두 방지되고 제거 되기를 기도한다.

(죤 질, John Gill)




"호화로운 옷을 입은 군주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고상하게 된 무릎을 꿇은 간구자보다 덜 빛난다.

그룹과 스랍들이 그들의 광휘로 하나님의 보좌에 에워싸고 있는 곳에 천사들과 천사장들이 모여들 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무한한 신뢰를 갖고 접근하여, 하늘의 주권자와 대화(기도)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존엄한 특권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와 같이 부여된 명예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크리소스톰, Chrysostom)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도움을 통하여 흠 없고, 의롭고, 거룩하게 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모든 악에서 멀리 하게 하소서, 진리를 말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절제로 빛나고 청렴 결백으로 장식되고, 지혜와 신중함을 통하여 아름답게 된 곧은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위에 있는 것을 명상하게 하시고 땅의 것들을 멸시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미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미덕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선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Gregory)



둘째 간구 (The Second Petition)

"나라이 임하옵시며" (Thy kingdom Come)




주기도문의 둘째 간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이다.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 3 : 2)고 외치신 예수님의 전도의 촛점은 하나님 나라였고 전도의 목적도 하나님나라 건설이었다.

유대인들은 기도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주기도문의 둘째 기원은 가장 짧지만 중심적이고 포괄적인 기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덧붙여진 송영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기원 중 "나라" 만은 다시 한 번 결론에서 언급된다.

참되게 헌신하는 영혼은 "나라이 임하옵시며"(Adveniat regnumtuum)라는 이 간구에 진심으로 참여해야 한다.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였을 때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세계에서의 나라 관념과는 다르다.

즉 거기에는 지상의 나라처럼 경역(境域)적인 개념이 없는 하나님의 주권 또는 통치를 뜻한다.



2.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나라를 가르키고 있는가?


분명히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 : 15)라는 이 말씀과 같이,"그리스도의 말씀(골 3 : 16)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별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의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와 다를 바 없다.



3.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특징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가지로 묘사해 두고 있다.

1)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있었던 나라이다.

2) 개념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장소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이다.

3) 이 나라는 내적, 영적, 도덕적으로 완전한 실현이 가능한 나라이다.

4) 영원한 영광의 날이 시작되는 그 날에 임하는 나라이다.

5) 이 나라의 왕은 그리스도이시다.

6) 이 나라는 죄가 없는 거룩한 나라이다.

7) 이 나라의 확장은 무한정한 나라이다.

8) 이 나라의 광채는 영원한 나라이다.

9) 하나님께서 절대 권능과 통치권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 하셔서 지배하시는 곳이다. 그리고 천국의 국민은 모든 성도와 천군 천사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 라는 칭호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중심적인 메시지였고 주기도문의 중심적인 기원이며,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인 만큼 공관 복음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샤마임 말쿠트는 신약 헬라어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η βαοιεία τον θεου)나 "하늘나라"(η βασιλεια τὥν ουρανων)와 의미상 다른점이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쓴 마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란 호칭을 쓰기를 꺼려했으므로 "하늘"이란 말을 썼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에서 마가, 누가, 요한은 주로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썼기 때문에 "하나님의나라"로 쓰는것에 대해 자유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5.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 와 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도래를 선포하신 후 그의 공생에 사역에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파송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케 하였다. 또 한편 대적자인 사단의 세력을 말씀으로 물리치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셨는데 마지막 예수님의 십자가요 부활 사건은 이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지상 사역과 십자가 및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마태 3 : 2 에서 공생애 제 일성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미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 발전과 확장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마태 28 : 19-20에서 최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일을 계승할 교회에 주신 선교의 대과제이다. 그러므로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 된 오해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1)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세상적으로 해석하고 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의 세속적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가치관이나 관심사 등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성경은 딤후 4 :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며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한다. 여기에 데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일 수 있고, 예수님이 아니고 돈일 수도 있다.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주기도를 드릴 때는 자아, 돈, 명예, 세상 향락이 나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 천국으로 해석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 사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혁명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해방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노력과 행동으로 건설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7.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 점진적으로 임한다.

1)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구원의 수단을 통해서 임하신다는 말이다 (롬 10 : 9-17). 즉 이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나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에 임재하는 믿음을 가진 중생 받은 사람의 마음에서 부터 시작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법이 우리 삶 속에서 집행되며 우리 생활에 의해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도록 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확장 된다.

중생된 자의 마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통해서, 그의 몸의 지체된 성도들에 의해 선포되므로 온 세계에 확장된다.

하나님께서 지상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 세계에 확장하는 데에 있다(마태 28 : 19-2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 : 1)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임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 되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입술의 고백을 통 해서 확장 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는 곳에는 사단의 나라가 좁아지며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외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 계속 확장되어 질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원은 이루어지는 것 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왕이시고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재림)과 함께 완성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인사 말은 마라나타(Marana-tha)였다(고전 16 : 22). 이 말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이다. 사도요한은 계22 : 20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그의 재림의 날이 오기를 기대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의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함께 재림 하실 것이다.

하늘의 성도들과 땅에 남아 있던 구원 받은 자들이 그분의 제사장들로서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리게 될 것이다(계 20 : 6). 요한 계시록은 이것이 천년 왕국이 될 것이라 말한다. 천년왕국 시대에는 예수님은 사단으로부터 온 모든 그릇된 것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고, 이 세상을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한 성도들은 기도의 응답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다스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때는 저주와 죽음은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에덴동산이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의와, 평강과, 영원한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찬양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더 이상 드리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나라를 소망한다. 따라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8.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 할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땅의 시민권을 하늘의 시민권으로 바꾸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는가?


1) 회개에 의해서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슬퍼 하며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 속에 "회개"의 기도가 포함되어야 한다.


2) 그 나라 시민권자로써 합당한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되도록 우리의 삶에 성화의 영향(Sanctifying Influence)을 끼치게 할 은혜(Grace)를 열심히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전적으로 주님의 성령에 의해 지배되며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할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의무를 올바르게 순종하며 수행하여 하나님 나라 천국 시민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여기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두 번째 간구를 드리는 기원자의 자세를 잘 요약한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으로 결론을 맺는다.

"……나라이 임하옵소서 라 함은 사단의 나라가 멸망하고 은혜의 나라가 홍왕하여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로 들어가 항상 있게 하시고 또 영광의 나라가 속히 임하게 하옵심을 구하는 것이다." 아 멘!











둘 째 간 구


1.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하나님 나라는 누구의 나라를 가르키고 있는가?


3.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특징은 무엇인가?


4. "하나님 나라" 와 "하늘나라"라는 칭호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5.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6.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7.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완성 되는가?


8.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기도에 관한 명상


"오 주여,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순례자인 우리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직 밖에 있으니, 우리를 준비시켜 그 곳으로 인도 하소서.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소서.

순례 중에 있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어 죽음 후에 우리 영혼이, 심판의 날에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영화롭게 되도록 하소서. 주여 그렇습니다. 속히 이 영화로움을 우리와 주님의 택하신 자 모두에게 주소서"

(퍼킨스, W. Perkins)



"오, 통치하시는 당신을 보는 즐거움이여 나의 사랑 하시는 주님이신 당신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혀는 일제히 당신께 예배, 경외, 영광, 축복을 드립니다.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친구인 당신을 땅 끝까지 옹호하고 받들겠습니다. 영광을 받으실지어다. 찬양을 받으실지어다."

(프란시스 하버갈, France Havergal)





셋 째 간구(The Third Petition)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마태복음 6장 10절-




주기도문의 세 번째 간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다. 이 간구는 앞의 간구와 함께 하나님에 관한 간구(Thou-Petitions)중 마지막에 있고 근본적으로 앞의 두 간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간구 전체의 마무리가 될 수 있다.

이 간구는 둘째 간구의 반복, 즉 둘째 간구가 실현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 실현 없이는 이름을 거룩히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이나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을 바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기도는 주기도문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핵심적인 간구 이기도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리해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되기까지 그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칼빈은 주기도문의 첫 세 간구에 대해서 "이러한 간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주시하게 된다. 반면 우리 자신은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게 된다"라고 했다. 기도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God's glory)에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의 갈망이 따르며,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려는 정직한 노력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우리 소원의 위대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면 나는 "우리(Our)라는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Thou-Petitions)를 드릴 수 없다. 만일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만일 내가 거룩하게 되려고 힘 다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교부 오리겐(Origen)은 이와 같은 탁월한 말을 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땅은 이미 땅일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하늘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 한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해야 한다. 비록 사람 들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날 그의 뜻이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이 셋째 간구는 앞선 간구들과 함께 결코 본질적으로 다른 간구가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Thou-Petitions) 한 가지 간구이며, 그 내용은 그의 이름(Thy name), 그의 나라(Thy Kingdom), 그의 뜻(Thy Will)을 포함 하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비밀의 뜻(God's secret will)이고, 이것을 그의 법령의 뜻(the will of his decree)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God's revealed will)이다. 이 두 가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비밀의 뜻 (God's secret will)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의 뜻이 우리에 의해 이루어지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이 비밀스런 뜻은 알 수도 없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흉중에 간직되어 있으며, 인간도 천사도 이것을 여는 열쇠를 가지지 못한다.

이것은 감추어진(secret)뜻이고, 작정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뜻은 하나님의 창조(계 4 : 11,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하나님의 섭리(단 4 : 35,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하나님의 은혜(롬 9 : 15,"내가 궁휼히 여길 자를 궁휼히 여기고")에 나타난다.


2) 하나님의 계시된 뜻 (God's revealed will)

이 뜻은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뜻의 선포로서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바가 무엇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계시된(Revealed)것이고 교훈적인(Preceptive)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스스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성경에 알려 놓으셨다.


3) 두 가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구분

감추어진(secret) 즉 작정적인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꼭 같이 땅에서도 항상 이루어진다. 아무도 그것을 훼방하거나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교훈 중 한 가지씩 어길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어겨지는 것이 분명하다.

모세가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에서 이 구분은 더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호한(Secret)"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Revealed)"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 (신 29 : 29)



2. 하나님의 뜻이 포함된 특징들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이다(God's will is absolutely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뜻은 절대 주권적이고, 그의 뜻은 절대 주권적 의지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 자기 뜻대로 처리 하실 수 있는 최고의 권리와 통치권을 가지고 있으시다.

때문에 그 뜻대로 행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 뜻을 정해 놓으시면 아무도 그 뜻을 거스릴 수 없다. 그의 뜻은 변함이 없으시며, 그는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해 어떤 피조물에게도 설명할 책임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 하시나니"(욥 35 : 13)라고 하셨다.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에서는 불레(βουλη, boule)라는 단어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뜻의 특징은 저항이 불가능한 뜻이고, 변경이 불가능한 뜻이라는 말이다.

성경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뜻이 라고 분명히 선언한다("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십자가의 인류 구속의 역사를 누가 작정했다는 말인가? 하나님 깨서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때문에 아무도 이것을 변경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성도의 구원도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엡 1 :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성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 하심이 있음을 암시한다(잠 16 : 33,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 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2) 하나님의 뜻은 불가항력적이다(God's will is irresistible).

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반대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방해 할 수는 없다. 로마서 9 : 19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For who resists His will)라고 하였다. 전속력으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는 지구를 누가 멈추어 서게 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는가? 그의 뜻은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공의로우시다(God's will is justice).

성경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 : 25)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자와 척도이다. 정의의 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대하실는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는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시지 않는다. 그는 엄하실지는 몰라도 불의하시지는 않다. 우리 인간은 부패하였기 때문에 거룩하고 과오가 없는 하나님의 의지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정의로우시고 공명하심 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간구해야 한다.

4) 하나님의 뜻은 포괄적이다(God's will is comprehensive).

이것은 하나님의 뜻 일체를 포함하는, 광대함을 의미한다. 그의 뜻은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 개인의 생명과 죽음, 개인의 건강과 질병, 창조와 종말,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의 포괄적인 뜻은 그의 재림, 영원한 나라의 수립을 내포한다. 우리들은 그의 포괄적인 목적의 뜻을 따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뜻은 좋고 은혜로우시다(God's will is good and gracious).

「칼빈주의 5대교리」가운데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유효한 부르심(Irresistible Grace or the Efficacious call of the Sprit)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며 인간은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중생사역은 하나님이 부르신 죄인은 틀림없이 구원받게 하시는 것이다.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으로 나타나신 것이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죄인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선한 청지기로서 좋으신 하나님의 일군이 되게 하신다. 성령은 이를 위하여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때 얼마나 선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 하게 될 것이다.


6)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인 구원이다(God's will is the security of Believers).

「칼빈주의 5대교리」가운데 성도의 견인 혹은 궁극적인 구원(The Preserverance of the Saints or the Security of Believers)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신앙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 중생을 통하여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영생의 진리이다. 영생은 인간의 뜻 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 아무도 없다. 주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으로 천국에서 누리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다. 비록 참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육신이 약하여 시험에 빠져 실패 하고 낙심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과 보호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러한 죄가 우리들을 구원에서 영원 히 상실케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완전히 순종하고, 자진하는 마음으로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사는 헌신을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나는 "오 하 나님이시여! 세상에서 주님의 포괄적인 뜻을 성취하소서, 그 뜻을 완성하소서, 나의 인생의 모든 투쟁과 시련, 모든 고통, 모든 불안, 모든 슬픔, 모든 질병, 모든 죽음, 모든 죄의 결과들을 주님의 영원한 계획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소서"라고 간구해야 한다. 이러한 삶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소유를 확인케 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궁극적인 영생 얻은 자로서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간구를 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7)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용적인 뜻"이 있다.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토 델레마수(το θελημα σου)즉 "당신의 뜻"으로 되어 있다. 신학자들은 이 단어를 "허용적인 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이 다르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시기도 한다는 말이다.

불순종하는 인간의 의지와, 사단의 방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될 때 이 부분에는 이 "허용적인 뜻"을 적용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허용적인 뜻"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 편에서의 협조가 없이는, 또 책임 있는 웅담이 없이는 이 뜻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허용적인 뜻"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것이 로보트처럼 기계적으로 살지 아니한다. 여기에는 죄도 지을 수 있고, 생각, 판단, 결정을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계처럼 살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허용적인 뜻"만으로 역사를 움직이시지는 않는다. 가령 모든 결정을 우리에게 다 맡겼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역사의, 인생의 삶의 방향을, 그의 절대 주권의 뜻으로 결정하시지 않으신다면 역사와 인생의 삶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불순종하는 인간의 의지와, 사단의 방해 때문에 혼란과 무질서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얼마간의 자유를 허용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 자유의 영역을 어떻게 관리하며, 이 속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결정을 하면 서 내 삶을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에 합하도록 형성해 갈 것인가가 중요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허용적인 뜻"을 이해하고 이루어 가는 데 도움을 주는 로레인 뵈트 너(Loraine Boettner)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그는 "이것은 마치 어항 속에 있는 고기들이 그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고기의 자유는 어항 속에서 제한된 자유이다."라고 했다. 어항 속의 고기는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와 개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테두리가 분명히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은 허용된 뜻을 사용하도록 자유를 주셨다.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와 이해와 적용 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올바른 간구를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고, 그의 지상사역은 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그의 가르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사명을 위해 오신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적으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에 있어서 죄인들로 불리워지던 사람들과 자신의 공로로서나 신분으로서 도저히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워질 수 없는 사람들, 또한 천대받고,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무식했던 사람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 참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던 자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선고하셨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고,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저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가운데 나타나 있다 (마 36 : 39,"아바 아버지여…… 나의 원(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뜻)대 로 하옵소서).

예수님이 당하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은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도 나타나고 있다(갈 1 :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히 10 :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그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셨는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처럼 '내 뜻은 무너지고 아버지의 뜻이 내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기도는 내 소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때 주님의 기도가 우리 기도의 원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 역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는 가장 간구하기 어려운 기도 중 하나이다.

신자들은 우리의 땅에 우리의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부분에 관하여 는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행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부분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방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셨다. 즉 수직적인 차원의 경우와 수평적인 차원의 경우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점을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살전 4 : 3, "하나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5 :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날 일부 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현대 신학자들이 수직적 차원 없는 수평적인 차원의 강조만 한다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이름을 높이고, 인간의 나라를 확장하고, 인간의 뜻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 리는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도론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그들은 당황하게 될 것이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다시 기억하여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5. 누가(Who)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이 간구를 성실과 진실로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사단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딤후 2 : 6, "저희로 깨어 마귀의 볼모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함이라").


2) 자신의 타락한 성향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벧전 4 :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하심이라").


3)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은 모두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 없이는 그의 뜻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거부하는 사람이다.


4)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진심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그의 명령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이며 그의 영광에 대한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이다.


5) 그는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태만함이 없이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과 열성이 넘쳐야(롬 12 : 11,"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다.

6) 그는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불평없이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기꺼이(대상 28 : 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 지어다") 그의 뜻을 행한다. 위선자는 선을 행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는 그의 의무를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이것은 자신의 뜻에는 배치된다. 즉 본의 아닌 것, 아무 덕이 없는 일을 한다. 그 예로는 가인은 그의 예물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마지못해서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은 행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뜻에는 어긋났던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의무에서 기쁨과 자원하는 심정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7) 그는 하나님의 뜻을 변함없이 행하는 사람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밤 낮으로 섬긴다(계 7 : 15, "그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 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니……). 이와 같이 우리는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불변성은 순종을 완성시킨다. 불변성은 순종의 머리 위에 면류관을 씌워준다. 필라델피아 교회가 변함없는 순종을 통해 이 영광스러움에 참여한다(계 3 : 11,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가운데 변함없이 나타남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한다(히 13 :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 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8)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애를 변화시켜서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환란과 고난의 현장으로 몰아넣으시더라도 그 하나님의 뜻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9)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신속하게 행하려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명령과 사명을 받자마자 즉시 행동에 옮기는 순종이 필요하다. 천사를 대표하는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데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움직였다(단 9 : 21,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많은 논란과 핑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뜻에 절실히 납득되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신속하게 이루었다(시 18 : 44, "저희가내 풍성(風聲)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가?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통해서 그 뜻을 세상에 이루려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간구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실 때 필요하시면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생명 다하여 주의 뜻을 이루는데 드리겠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저에게 가르치시며 제 속에서 행하시며, 저를 통해 이루소서."




6.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식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정받기 위해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할까 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My Lord, My God)으로 믿는 일을 할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요 6 : 40,"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 요 6 : 29,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니라...). 이것은 모든 신앙의 총화이며, 두 돌판의 축약형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능동적인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고,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거룩한 삶(성화, Sanctification)의 노력을 통하여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뜻을 따라 거룩한 삶의 노력을 (살전 4 :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실천 하므로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참된 간구를 드릴 수 있게 된다.


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복음을 전파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복음으로 오셨고, 복음을 위해 사셨고, 복음을 완성하셨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고 하시었다.

그 분은 복음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고, 새 하늘 새 땅을 약속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셨고 전파하셨다. 그가 본을 보이시며 이루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장 번쩍이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은 그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 뜻을 위해 전 생애를 걸었고 전도인의 일 (딤후 4 : 5, the work of an evangelist)을 위해 살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의 이 뜻을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롬 8 : 34)에서 간구하시며, 그 분의 몸 된 교회가 완성될 때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가 이 전도인의 일을 열심히 할 때 하나님의 뜻은 더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Spirit of God)으로 봉사하는 것이다(빌 3 :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하나님을 영적으로 봉사하는 것은 내적인 원리로부터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내적인 순종의 원리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롬 16 : 26)라고 하였다. 믿음은 모든 의무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중생이란 씨앗으로부터 열매 맺는다. 때문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만큼이나 외적 순종은 흉내 낼 수 있다. 그는 똑같이 기도할 수도 있고, 똑같이 주님께서 세우신 규례(Ordinance)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열매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봉사는 내적인 은혜에 뿌리를 내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4) 하나님의 뜻을 행^는 것은 그 속에 영적 은혜의 혼합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믿음, 사랑, 겸손 등으로 합성되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신다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하 시는 모든 일을 가장 선한 것으로 해석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때로는 나를 환난 가운데 몰아내시듯 치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한다. 겸손한 자는 자기의 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와같이 순종하는 마음의 상태는 은혜가 넘친다.


5)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목적 있는 삶과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책임 있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하늘에서 인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일 5 : 14-15에는 기도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을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 뜻이 성경적인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 속에 계시되어 있다. 그 속에서 약속과 교훈과 교리들을 찾아야 한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일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데 귀중한 열쇠이다(요한 15 :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 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 뜻이 성령님께서 허락하셨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어떤 기도의 제목을 강하게 심어 주기도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주체가 되며(유다서 1 : 20, "…성령으로 기도하며"), 성령은 직접 우리의 기도를 도와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간구를 드리도록 하게 하신다(롬 8 : 26,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복종하고 엎드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령 혁명의 기수가 될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어떻게 순종했으며, 어떻게 기도했는가를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 사이에 갈등과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 26 : 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의 기도는 그의 소원(뜻)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그래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기도의 원전이 되는 모범적인 기도이다. 한국 신자들의 기도는 겟세마네적인 기도 보다 광야의 야곱적인 기도가 많다. 즉 간구의 끝에는 요청인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한다.

간구의 요소 가운데 하나님께 간청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기도의 모범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거든 도와주시옵소서 즉,너무 자기의 뜻을 앞세워 강요하는 기도보다도 그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서 이 땅을 다스리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미움과 반목이 이 지구촌을 어둡게 하고 있지만, 이 기도를 드리는 곳에 죄를 이기는 승리가 있고,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이 있고, 참을 말하는 진리가 있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고, 마귀의 뜻이 쫓겨 남을 당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영광된 삶을 드리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의 모범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우리가 될 것이다.



7.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요소들


1) 우리의 소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피라.

이것은 "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주신다. 그 소원은 거룩한 소원, 아름답고 좋은 소원, 바람직한 소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의 뜻을 따라 소원을 일으켜 주신다(시 37 :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빌 2 :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무엇을 향해 소원이 일어나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 소원은 내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따라 일어나는 소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나의 주장을 꺾고 따르겠다는 즉 내 생각과 내 소원은 제하는 것이다.


2) 소원하는 바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라.

소원하는 바 모든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3) 주변에 표징(表徵 : sign)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살피라.

즉 환경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원하는 바 동기와 말씀과 일치 될 때 주변의 환경에 표징을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환경을 잘 살펴야 한다(삿 6 : 17,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4)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확신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죠지 물러는 "우리가 그것을 실천 할 수 있는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 하라"고 했다. 기도에 확신이 오면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려는 기쁨과 평안이 깃들게 된다.


5) 그의 뜻을 행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고전 10 : 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 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즐거움을 갖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항상 즐거워하는 경건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게 된다.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는「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찬송시를 썼다. 당시 교계는 1648년 종교 전쟁이 끝나고 로마 카톨릭교의 전성기였다. 그는 루터파 개혁교회가 날로 쇠퇴할 때 독일 지역에 단 하나 남은 루터 교회 목사였다. 36개의 광활한 지역을 담당 하면서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고, 심방을 나가면 온종일 빈집 돌기가 일쑤였다. 1704년 어느 날 부부가 전도 심방을 다녀 밤늦게 돌아와서 보니 집에 화재가 나서 불에 타 폐허가 되었고 그 잿더미 속에 소사한 어린 아들 형제가 나란히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지만 곧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 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이 "나의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이었고 찬송시가 그에 의해 작시가 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기도하였던 모습을 상기하면서 이 찬송시를 탄생 시킨 것으로 본다. 이 찬송은 인생 최대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체념하여 "주여 뜻대로 하셨군요"가 아니다. "주님의 뜻은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가 바로 찬송시였고 기도의 원전을 드린 것이다. 진정으로 "주여!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결 론



하늘에서는 오직 하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 오직 하나의 뜻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마 7 : 21)이시고, 땅에서는 그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7 : 21). 이 땅의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부패했고, 타락한 천사인 마귀와 사단의 뜻이 허용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방해를 받는다. 땅에는 적어도 40억 이상의 인구가 있다면 40억의 뜻이 있다. 그러나 하늘에는 오직 하나의 뜻만이 있고 그 뜻만이 이루어져 왔고, 그 뜻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죠지 트루엣(George Truett)은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 지면을 통해「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는 노력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삶의 출발과 그 종착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출발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 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발이 머무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필자가 쓴 논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도록 기도 하십니까?라는 항목에 응답자중 76.1%가「예」라고 대답을 했다. 세 번째 간구를 드리는 우리의 대답은 어떠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그 분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인생이 될 결심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용기를 갖도록 하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시 143 : 10). 옛 성도는 이렇게 간구하며 살았다. 우리의 한 번 밖에 없는 인생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주님의 모범적인 삶이 가득히 담겨지기를 소원한다.

















셋 째 간 구


1. 둘째 간구와 셋째 간구의 두 기원과의 상호 인과관계는 어떻게 되 어 있는가?


2.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는 두 가지 뜻과 구분은 어떠한가?


3. 하나님의 뜻이 포함된 특징들은 무엇인가?


4.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용적인 뜻"이란 무엇인가?


5.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


7. 하나님의 뜻은 누가 이룰 수 있는가?


8.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9.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중에 목적 있는 삶과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책임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해 어떻게(How) 삶을 살아야 하는가?


10. 하나님의 뜻을 발견 하도록 도와주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기도에 관한 명상


기도는 효력을 발생한다.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했을 때 리브가를 순전히 만났다.

야곱이 기도하면서 천사와 씨름 했을 때 천사를 이겼다.

또한 야곱이 기도했을 때 20년 동안 쌓인 복수심이 에서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모세가 기도하자 아말렉은 패배하였다.

여호수아가 기도하자 아간이 발견되었다.

한나가 기도하자 사무엘이 출생 하였다.

아사가 기도하자 승리 하였다.

여호사밧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셨다.

이사야와 히스기야가 기도하자 열 두 시간 이내에 185,000명의 앗수르 사람들 이 죽임을 당했다.

다니엘이 기도하자 사자 입이 봉해졌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기도하자 유대인들을 죽이려던 음모는 좌절되고 하만은 자기가 마련한 교수대에 달려 죽게 되었다.

느혜미아가 기도하자 왕의 마음이 즉시 부드럽게 녹아졌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삼년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가 그가 다시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

엘리사가 기도하자 죽었던 어린아이가 살아났다.

신자들이 기도하자 베드로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가 큰 능력이 있으며, 응답된다는 것을 분명 히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 5 : 16 은 말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존 맥아더, John MacArthur, Jr.)


넷째 간구(The Forth Petition)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마태복음 6장 11절 -




서 론


주기도문은 전반부의 하나님에 대한 청원(Thou-Petitions)에 이어서 대조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청원(We-Petitions)들이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주기도문의 헬라어 구문에서 잘 드러내고 있는 바와 같이 전반부 세 청원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이라는 구문 형식을 통해 그것이 모두 하나님에 대한 청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후반부 세 청원을 보면 헬라어 성경은 "우리를 위한 양식", "우리의 죄",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둥의 구문을 통해 이 청원이 모두 우리 자신(사람)에게 밀접하게 관련된 것임올 강조 한다. 헬라어로 기록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의 후반부 세 청원에서「우리」라는 복수 주격 1인칭 대명사가 8회씩이나 기록된 것은 이 청원이 우리 자신(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전반부의 세 청원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 조물주께 드리는 객관적인 청원이었으나, 후반부의 사람에 관한 청원은 "우리에게", 또는 "우리를"의 목적격과 더불어 죄인이 전능하신 이에게 드리는 주관적인 청원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사람)에게 직접으로 관계되는 청원이 숫자상으로 넷으로 보이는데, 이 청원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을 암시하는 것을 세 청원으로부터 뚜렷하게 접근 시킬 수 있다.

"우리를 위한 양식"에 관한 청원으로부터 현세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공급 받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죄"에 대한 청원으로부터 성자 예수님의 중보(仲保)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에 대한 청원으로부터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의해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마귀, 사단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후반부의 세 청원은 육신의 생활에 관하여 육신의 필요와 양식을 구하고 신령한 영적 요구와 관련시켜 사죄를 구하고 시험에서의 구원함을 위하여 간구한다.

이제 후반부에서 첫 번째 시작되는 넷째 간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먹고 입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청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청원은 산상보훈 중에 가장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 33)는 말씀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네번째 청원은 "이미"(Already) 하나님께 드려진 영광과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청원 사이에 요청되는 청원이기 때문에 "중간기도"(interim prayer)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관한 세 청원이 끝나고, 이제부터 우리 자신(사람)을 위한 청원의 시작인 네 번째 청원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의 정의를 살펴보면,

"주기도문의 넷째 기도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가? 주기도문의 넷째 기도는 곧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함인데 하나님의 은사로서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좋은 것 중에 만족한 부분을 받게 하시며 아울러 그의 축복을 누리게 하옵심을 구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에 필요한 것과 관계되는 청원에서 모든 일상 생활의 기도에도 현세적 관심사가 영적 관심사에 종속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제하면서 네 번째 청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우리를 위한 양식" 즉 육적으로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이 청원이 영적으로 필요한 것과 관련된 그 다음의 청원들 보다 먼저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메튜 헨리는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이 청원이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의 서두에 나온 이유에 대하여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행복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와 뜻을 구한 후에는 이 세상의 현실적인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남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일용할 양 식」을 그에게 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장차 올 때를 위한 양식」, 또는 이 세상에서 우리 조건 에 맞는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 30 : 8「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 우리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 편리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현세 삶에 필요한 물질을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영적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현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공급해 주시므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합당한 삶을 더 충실히 살아 갈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양식"의 청원이 먼저 나온 것은 성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공급받기 때문에,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데 사용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 성장을 촉진할 것이며, 날마다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깨닫고, 더 고귀한 축복을 구하도록 격려와 자극을 받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이 청원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솔직하시고 현실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을 알게 되며 진실하고 모범적인 그 분의 기도를 배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할지라도 너무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입고, 먹고, 마실 것, 필요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음을 본다. 여기서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 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먼저 구하라고 하신 말씀은「염려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경고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 경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기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오해 속에서 자아의 현세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보다는 직접 현실과 먼 비현실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기도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을 위한 기도의 첫 번째 청원의 자리에 먹고 마시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 간구를 두셨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셔서 먹고, 마시는 문제, 경제적인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체험해 보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자신도 모두 다 배부르게 먹고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심각한 일인지 잘 모른다. 즉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생명 그 자체인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성을 아시고 우리의 약함을 격려해 주시고, 도와주시기 위해 솔직하게 먹는 것부터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으니까 영혼이 중요시 되고, 육적인 생명이 있기에 영적인 생명도 심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의 양식"을 우리의 청원 첫 머리에 구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2. 네 번째 청원의 "오늘날"(날마다)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마태의 주기도에는 '오늘날'을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 today)이란 부사를 사용했고, 누가의 주기도에는 (눅 11 : 3) "카세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 each day)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날마다"(each day 또는 every day)는, 사실상 "오늘"(today)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날마다"와 "오늘날"이란 오늘 하루의 삶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이란 삶을 살아야 한다. "어제"(yesterday)는 이미 지난 오늘이고, "내일"(tomorrow)은 다가올 오늘 이다. 성경은 오늘의 중요함에 대한 교훈들이 있다. 구원의 시간은 오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 에 있으리라."(눅 23 : 43)라고 하셨고,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 : 9)라고 오늘이 구원에 이르는 귀한시간임을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에 완성된 자세로 살아서 오늘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떳떳이 설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눅 12 : 20)"라고 하셨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살게 될 마지막 날이 될런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이상 더 오늘이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으며 그것을 하루하루 먹도록 하셨다(출 16 : 13-20). 매일의 만나는 당일에(오늘) 다 소비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누군가가 다음 날 아침에 조반은 어디서 먹을까 염려 하여 물었다면 "우리의 염려는 오늘 하루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만나를「오늘」내려 주셨다. 만일 우리가 오늘 먹을 빵이 있다면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 하지 말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내일의 염려는 불신이다. 그리스도인의 만나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오늘에 허락해 주신다. 의식주와 삶의 여러 분제로 염려하는 자들 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와 함께 접목시켜 주시는 말씀인 "내일 일 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 : 34)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네 번째 청원에서 "우리에게" (US)란 의미는 무엇인가?


주기도문 서론에서 밝힌 바 있지만 주기도문에서는 복수대명사 즉 "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단수 인칭대명사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에게 지은 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이러한 기도는 우리들 자신이 필요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에 관한 간구와 중보 기도로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이기적인 "나는", "나를", "나의"를 가지고 주님께 나오지만 주기도의 기도는 비이기적인 기도를 드리게 한다. 주기도문에는 후반부의 청원에만 우리라는 단어가 8회 기록되어 있다. 왜 우리는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복수형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함을 보여주신다.

다윗은 기도할 때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시 125 : 4)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라고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로 시편을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그 시편을 끝 맺는다. 사도행전 여러 곳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기도 역시 공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행 4 : 29 ...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또 종들로(복수형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예수님은 공적 정신으로 모범적인 기도를 드리신 분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불행에 대해서 그의 하나님이 그의 자비하심을 그들에게 베푸시도록 기도한다. 특히 성도들을 위한 공적 기도에 힘쓸 것에 대하여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 : 18)라고 하였다.

예수님은「우리」를 위해 사셨고「우리」를 위해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주여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저들은 우리도 포함된다.)라고 기도 하셨다. 네번째 청원에 "우리를"이란 의미는, 이기적인 거미와 같은 사람의 기도를 비이기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바꾸게 해 주며 다른 사람들 의 유익을 위해 수정 같은 시냇물로 생기나게 해주고 황금 같은 태양빛의 햇살로 밝게 비춰 준다. 비이기적인 기도는 그의 기도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둘러싼다.



4.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말 개역 성경에 "일용할"이란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피우시스"(επιούσιος)라 기록한다. 이것은 주기도문에만 나타나고 신약 다른 곳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낱말이므로 단정적으로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주기도문의 근본 정신과 뜻을 혼돈하게 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첫째 : "에피우시우스"(επιούσιος)는 전치사 에피(επι : 위)와 우시아(ούσια : 존재 또는 본질)의 합성어로서 "존재의 필수적 인 것"(necessary for existence)이란 뜻이다.


둘째 : 에피(επι)와 우산(ουσαν = ημεραν : 날)의 합성어로서 "오늘을 위한"(for the current day, today)의 뜻이다. "오늘을 위한 양식"과 존재 즉 "생존에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시간에 관해서는 내일이나 종말적인 미래가 아닌 "오늘"로 양식의 내용 및 분령에 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 "양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아르토스"(αρτοτ : 양식)로 기록한다. 본문의 "톤 아프톤 헤-몬"(τον αρτον ημωυ)은 문자적으로 우리의 빵(Our Daily Bread)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 육신에 필요한 육적 양식이란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는 육적 양시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해석했고 "일용할 양식이란 육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즉, 음식과 의복과 가옥과 가정, 전답, 가축, 금전 기타 여러 물건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꾼들, 또는 경건하고 진실한 지도자, 훌륭한 정부, 적당한 기후, 평화, 질서, 건강, 명예, 선한 친구, 믿을 만한 이웃 등을 말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르토스"를 우리말 성경 에서는 "빵"(bread)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넓은 뜻으로서 식물 전체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공급되는 물질을 뜻한다. 주기도문의 넷째 간구에서 예수님은 본인 자신이 인간 현실에서 체험하신 바대로 인간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도 육신에 소용되는 양식은 인간의 삶에 충분 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 조건임을 드러내 주셨다.


둘째 :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요 6 : 33-35)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피와 함께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 : 35) 언급되므로 성례(Sacrament)를 위한 기도라고 했고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성찬식(Daily Communion)에서 쓰여 지기도 했다. 성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참된 생명이 됨을 포함하기도 한다.


셋째 : 하늘나라의 떡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눅 14 : 15)라고 기록했는데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데 이 간구는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았다.


넷째 :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 해석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요 6 : 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 6 : 35)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해석했다.

이상과 같이 정리해보면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양식, 영적인 양식, 영육간의 양식으로 언급된다. 우리 육신의 양식은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인데, 생명에는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시에 영의 생명이 있다.

영적양식, 육적양식 이 두 가지는 마땅히 간구할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서의 청원은 좁은 뜻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뜻으로는 영적 양식을 다같이 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5. 넷째 간구에서 "주옵소서"란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는 "주옵소서"라고 같은 동사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도스"(δσς)이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디두"(διδου)이다. "도스"는 "디도미"(διδωμυ ,주다)의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서 일회적인 동작을 말하는데 대해서 누가복음의 경우는 현재 명령형으로 반복적인 또는 세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이 마태의 과거형 동사와 누가의 현재형 동사는 각 복음서에 기록된 "주옵소서"의 동작을 수식하는 마태복음의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이란 부사와 누가복음의 "카데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이란 부사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필요한 양식을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한 번 "주옵소서"라고 계속해서 청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의 이 청원에서 하나님은 오늘날(TODAY), 주시는 손(GIVE HAND)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시켜준다.


1) 하나님은 오늘날(TODAY), 매일(DAILY), 주시기(GIVE)룰 기뻐하신다.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으나"(사 46 : 10).


2)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구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 : 1)


3)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 로다"(시 37 : 24)


4)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 41 : 10)


5)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우리가 겸손할 때 높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 : 6)


6)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에게 일용할 식물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시 104 : 27-28)

이와 같이 이 청원에서 우리는 "주옵시고"(give, 주다)라는 단어로부터 이 생의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gift, 은사)이라는 것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창설자와 증여자이시고, 그리고 현세적인 물질들을 위해서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날마다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 : 8)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청원에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가난한 자,궁핍한 자와 우리 집안 식구들과 영적인 식구인 성도들을 위해 드리는 비이기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6. 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1) 오늘, 매일 이미 우리 손에 좋은 것이 풍성하게 공급되어 있을지라도 계속, 진심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청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신다면 현재 내게 공급되어 있는 풍성한 것일지라도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없어질 수 있다. 가령 재난이나 자연적인 화를 만난다거나, 불이 났을 경우 풍족이 공급되어진 것 일지라도 잿더미가 될 수 있다.


2) 오늘, 매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시 104 : 27)


3) 오늘, 매일 우리가 노동이나 상업적인 수단을 통해 많은 물질적인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노동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 오늘, 매일 우리 인간들이 육체적인 연약함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건강을 주시지 아니하면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인간의 육적인 결핍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5) 오늘, 매일 우리의 현세적인 삶에서 아무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 : 1)


6) 오늘, 매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를 다 극복해야 하므로,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 : 34)


7) 오늘, 매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 : 1)


8) 오늘, 매일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기도할 수 없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이기적인 기도의 대표적 기도이다.)

9) 오늘, 매일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인 그 생명이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구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행복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10) 오늘, 매일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확한 일용할 양식을 아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뿐이기 때문이다.



7.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이 내일이나, 미래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가?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준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가?

우리는 미래와 후손을 위해 필요한 것을 잘 활용하고 절약해서 저축 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수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장래를 위해서 큰 재산을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하여 우리의 정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스스로 괴롭혀서는 안된다. 그러나 미래를 위하여 저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재물을 저축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으니"(대상 29 : 2).

바울은 교회를 방문할 때 미리 헌금을 하도록 요청했다.

"너희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으니"(고후 9 : 5)

장래를 위해 교회의 헌금이나, 개인의 물질을 모으는 일은 성경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사욕과 정욕을 위해 축적하는 것은 악의 뿌리를 심고 키우는 것과 같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 : 10).

우리는 이 청원의 진정한 뜻을 통하여, 물질적인 필요를 구해야 한다. 이 필요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셔서 신성한 노동을 통한 직장 생활, 양심적인 기업주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배가 있는 곳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자에게 진정한 응답이 기대된다고 본다.



8.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은 감사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 청원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는 신앙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일용할 양식"을 사용함으로서 감사를 표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그 물질로 주님을 공경하는 감사의 표현을 원하신다("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잠 3 : 9).

진정한 감사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교만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잠 30 : 9)자세가 섞일 수 없다. 오직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겸손한 자는 이렇게 간구한다. 즉,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 (잠 30 : 8)." 교만한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교만은 감사의 흐름을 정지시킨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일용할 양식(필요한 양식)을 받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획득한 것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 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은 것 까지라도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청원을 통해 육적이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모든 축복에 대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이 간구의 진정한 의미와 같은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 론



필자의 서재 책상 위에 원고지와 함께『렘브란트』의 명화가 있다.

이 그림은 검소한 식탁 위에 빵(bread)과 국(soup)이 놓여있고 덥수룩한 횐 수염의 노인이 작업복 그대로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식전감사(食前感謝)의 모습을 비유하여 그린 것이라고 전해온다. 이 그림이 던져주는 의미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우리 기도의 자세는 어떠한가? 필자는 주기도문 연구 논문에서 이 청원을 어떤 자세와 내용으로 드리는가에 대한 응답자 가운데 67.2%는 항상 응답해 주신다고 했고 나머지 32.8%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를 검토해 볼 때 주기도문을 드리는 10명 중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3-4명은 이 글을 대하는 기회를 통하여, 이 청원에 대한 확신이 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잘못된 기도자의 자세에 서 있다면 야고보 기자의 권면 즉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 4 : 3)는 말씀을 통하여 바로 잡아지기를 원한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들의 삶의 물질이다. 그 물질을 주시는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 물질에 대한 우리들의 간구는 "주옵소서"(give)이다.

구하는 사람은 누구(Who)인가? 우리들이다.

언제(When)달라고 하는가? "오늘날"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처럼 "오늘"에 이 간구를 드리며 누가복음에 기록된 "날마다" 처럼 "매일" 이 간구를 끊임없이 드리자.

초대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은 아침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드리고 저녁에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한다.

이 청원이 비이기적이고 겸손한 개인의 간구에서 시작되고 가정예배의 제단으로 연결되며, "우리"라는 세계 지구촌의 모든 자를 원해 하나님께 일용할 것을 구할 때 모든 필요가 응답되기를 기원한다.







넷 째 간 구


1. 네번째 청원이 전반부의 우리 자신에 대한 청원(We-Petition)과 비교가 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2. "우리를 위한 양식" 즉 육적으로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이 청원이 영적으로 필요한 것과 관련된 그 다음의 청원들 보다 먼저 나온 이유가 무엇인가?


3. "오늘날"(날마다)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4. "우리에게"란 의미는 무엇인가?


5. "일용할 양식"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6. "주옵소서"란 의미는 무엇인가?


7. 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8.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이 내일이나 미래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가?


9.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은 어떤 신앙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가?















기도에 관한 명상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한다.


어느 시골의 농사철 때 너무 가물어서 교회에서는 비 내리기를 원해서 함께 모여 합심 기도를 하기 위해 뒷동산에 가기로 했다.

교회 앞마당에 교회 목사와 장로 집사들이 모였다. 그때 한 어린 소녀가 우산을 가지고 왔다. 왜 우산을 가지고 가느냐고 어른들이 묻자 "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비가 올 것이니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우산이 필요하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에 어른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지나가는 이야기 같지만 웃고만 넘길 것이 아니다. 기도란, 비를 달라고 기도하러 갈 때 우산을 들고 나서는 어린 소녀처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의 무릎은 굳어져야 한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의 생활을 하며 의인의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을 기억하고 늘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끓고 중보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무를 끓고 항상 기도하므로 그의 무릎은 약대의 무릎처럼 굳어졌다고 전해 온다.




기도해 주는 교인


영국의 대설교가인 스펄죤 목사님께 어떤 사람이 찾아와 물었다. "목사님 교회의 큰 부홍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스펄죤 목사님은 그 손님을 자기 교회 기도실로 안내했다. 그는 기도실을 가리켜 보이면서 "여기 이 교회 지하실 마루 바닥에서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해 주는 300명 씩의 기도팀 교인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다섯째 간구 (The Fifth Petition)




주기도문의 다섯째 간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다. 이 간구는 죄 용서(죄의 사유함)에 대하여 가르친다. 다섯 번째 청원의 헬라어 성경은 "과거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반드시 용서해 주지는 못했으나, 이후로는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그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인간에게 가장 실질적이고 절실한 필요는 "일용할 양식"(Daily)을 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영적인 필요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한 간구이며 이것은 "일용할 양식"과 함께 다섯째 간구는 인간편에서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는 신앙생활의 시작의 기초이고 영적 거듭남의 원천이고 구원 이후 신앙의 성화에 이르는 거대한 신앙의 그루터기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교훈 가운데 "네 이웃의 과오를 용서하라"는 말이 있다. 일용할 양식을 매일 구하듯 죄 용서함의 기도는 매일(일용할 용서) 구해야 한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미래에 대한 청원이지만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과거에 대한 청원이다. 오늘 필요한 "일용할 용서"에 대한 주기도문의 다섯째 기도에서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 가를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의 정의를 살펴보자.

"주기도문의 다섯째 기도는 곧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함이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사하여 주옵소서 함인데 우리가 그의 은혜를 힘입어 진심으로 다른 이의 죄를 사하였으니 더욱 용감히 간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올바른 유지를 위해 떼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 육신을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이, 다음의 청원에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용서의 필요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아야겠다.



1.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은 처음 네 가지 청원과 다르게 헬라어 성경에는 "그리고" 즉 카이(Kai, and)라는 연결어구와 함께 시작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 가?


주기도문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그리고"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다음에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라는 말씀이 따른다. 처음 세 기원도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청원은 두 청원 사이에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1) 인간에게 있어서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은 가장 실질적이고 적절한 것이지만, 죄사함 받음은 인간의 영적 필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두 간구는 민간 편에서 볼 때 동일하게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필요와 관심사는 먹고, 마시고, 입고, 거주 하며 사는(의.식.주)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 하지 말라"(마 6 : 31)라고 육적 필요에 대한 염려를 금할 것을 말씀 하셨다.

이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 : 34))라고 육적 필요에 앞서는 영적 필요인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양식이 육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서로 유기적 관계를 포함 한다는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 사는 것 특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단지 영적인 삶의 문제는 실제로 죄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2) 인간은 죄 사함 받음이 없이는 오늘 육신의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가치 기준에서 비교 될 수 없고 가진것 자체가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메튜 헨리」의 "만일 우리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은 도살용 양을 살찌게 하듯이 우리를 살찌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라는 의미 심장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3)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 필요한 것 일용할 양식을 위해 오는 축복의 통로를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good thing)을 막았느니라"(렘 5 : 22)

사죄의 축복과 함께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한 없는 축복을 주시도록 기도 할 때마다 "그리고(and)"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한다.


4) 인간의 일용할 양식은 식욕을 만족시키지만 그러나 죄의 사함은 양심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5) 인간의 일용할 양식은 우리로 하여금 안락하게 살도록 해 주겠지만 그러나 죄의 사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안락하게 죽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6) 넷째 간구와 다섯째 간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 완성시와 현재에 다같이 관련 되기 때문이다.



2.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에서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 기록된 죄"에 대하여?


1) 신약 성경 헬라어에서 "죄"와 관련된 용어들은 어떻게 표현 되는가?

첫째 : "오페이레마(opheilema - οφείλημα)"이다.

이 단어는 "빚"(debt)이라는 뜻으로,"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죄"에서 유래 되었다("일 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 : 4)

둘째 : "하마르티아(hamartia - αμαρτία)"이다.

이 단어는 "빗나가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올 맞추지 못하고 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죄"에서 유래 되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 : 34).

셋째 : "파라프로마(paraptoma - παραπτωμα)"이다.

이 단어는 "미끄러 넘어지다"라는 뜻으로써 "부주의로 짓는 죄"에서 유래 되었다("…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후 5 : 19).

넷째 : "아노미아(anomia - ανομία)"이다.

이 단어는 "불법(不法)"이란 뜻으로써 "알고 짓는 죄"에서 유래가 되었다("…너희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롬 6 : 19).

다섯째 : "파라바시스(parabasis - παραβασις)"이다.

이 단어는 "건너가다"란 뜻으로 "공의와 불의 등에서 자꾸만 좋지 않는 쪽으로 건너가려는 죄에서 유래 되었다("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 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 딤전 2 : 14).


2) 주기도문에서 마태와 누가 복음의 죄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어떻게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가?

마태가 쓴 주기도문은 "오페일레마"(οφειλημα)누가가 쓴 주기도문은 "하마르티아"(ἁμαρτια)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가 쓴 주기도는 유대인을 상대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무의 비유로 아람어 "호오바"의 개념 "빚"에서 도입하여 이 어휘를 사용했다고 본다. 누가가 쓴 주기도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에게 더 익숙한 "하마르티아" 즉 어원적으로 "과녁에 빗나가다"를 사용했다. 이처럼 두 어휘가 어원적으로는 다르나 뜻으로는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3) 왜 "죄"라는 어휘가 "빚" 이란 뜻과 상관 관계를 가지는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주기도문과 상관 관계를 가진 마태 18 : 23-35에 있는 빚진 자에 관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에서 이미 용서를 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탕감해 주지 않은 것이므로 주기도에서의 원리와 동일한 점이 보인다. 이처럼 죄와 빚의 성격은 유사성이 짙다. 곧 죄는 빚이며 그리고 모든 죄인은 채무자이다. 죄는 1만 달란트의 빚에 비유된다(마태 18 : 24).



죄가 빚으로써 갖는 성격은 무엇인가?


(1) 죄의 빚은 부인 할 수 없다. 다른 빚은 사람들이 부인 할 수도 있다.

(2) 죄의 빚은 회피할 수 없다. 다른 빚들은 미룰 수 있다.

(3) 죄의 빚이 용서 받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한 죽음에 묶여 있게 된다.

다른 빚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채무자는 감옥에 간다.

원금도 이자도 지불하지 못하고 파산자가 될 때 무기징역 판결도 받을 수 있다.

(4) 죄의 빚은 얼마나 많이 하나님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알지 못 한다.

주기도문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지만 헬라어 성경은 복수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빚을, 빚 위에 빚을 더 지고 살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빚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을 때도 있다.

(5) 죄와 빚은 하나님을 미워하게 된다.

악질적인 채무자는 채권자를 미워하기 쉽다. 채무자는 그의 채권자가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며 그를 보기를 좋아 하지 않는다.

(6) 죄의 빚을 가진 자는 겸손하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가득 하며, 숨어 살거나 체포될 경우를 두려워한다.

영적인 부채를 가진 자들은 면제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자신을 겸손 하게 한다.


4) 주기도문의 빚(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채권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는 채무자로 나타난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빚 지불 능력을 대신하시고 보증인이 되신다.

누가 복음서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을 채권자로("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 자가 둘이 있어"… 눅 7 : 41)기록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신 분으로 율법을 주신 분이시면서도 재판장이 되심을 보여 준다. 재판장으로서 주님은 우리 각자를 불러 각자의 청지기 직에 대한 회계의 날이 있을 것을 알려 주셨고("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 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눅 19 : 15), 자기의 빚(죄)을 회계하고 슬퍼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빚(죄)을 청산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들이 받을 형벌을 예고하고 있다. 이 빚진 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지불 불능의 채무자이고, 보상능력을 불이행 할 수밖에 없는 파산자이지만 우리의 빚(죄)을 예수 그리스도는 갚으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은 빚(죄)에 눌린 영혼들을 보상시키며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빚(죄)에 대한 보증인으로 그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충족시켜 하나님께 완전한 보상을 해 주신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빚 (죄)의 보증인에 대하여 다윗은 예언하여 말하기를 "내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 : 4)라고 그 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약에서 이 보증인에 대해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 : 22)이라고 확실하게 증거 하고 있다.


5) 우리의 빚(죄)은 어떻게 청산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빚(죄)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진 빚(죄)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빚을 청산(용서)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 : 19)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빚(죄)을 고백하면 하나님의 빚 장부 기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지워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고백할 뿐만이 아니라 보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영적 빚이 지불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 특권을 우리는 대법원의 법정 최고 판결자이신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혜택을 받게 된다.



3.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에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는 "죄의 용서"에 관한 간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제 1의 축복이며 처음 자비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죄를 못 본체 하시고 그 죄의 상처를 치료시키시며 죄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죄 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지불하시므로 그 댓가로 우리를 양자 삼으시고 성화(Sanctification) 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왕관을 씌우실 것이다.


1)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만왕의 왕의 특권이시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 : 7)라고 하였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직 채권자만이 빚을 면제 할 수 있다.


2) 죄를 용서하는 권세에 대하여

성경은 성직자들에게 위임된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성직자들은 권위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죄를 면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언적으로만 할 수 있다.

성직자들은 죄로 상한 심령들에게 용서의 약속을 적용시킬 특별한 직분과 권위를 가졌을 뿐이다. 성직자는 자기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통보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사람이 죄 용서 받았음을 선언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직자 자신의 이름으로 권위적으로 죄를 용서 할 수 있는 권능은 절대로 수여 되지 않았다.


3) 죄의 용서에 대한 정의는?

(1) 죄의 용서란 죄악을 제거하는(take away)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욥은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욥 7 : 21)라고 하였다. 죄의 용서란 히브리어로는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무너져 내리려 할 때 다른 사람이 와서 그것을 들어 올려 주는 것을 인용한 비유이다. 이처럼 죄의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얹혀져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심으로써 양심으로부터 이것을 들어 올려서 그리스도 위에 얹혀 놓으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 6)라고 하였다.


(2) 죄의 용서란 지은 죄과를 말소해 버리는(blot it out)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25)라고 기록하였다. 도말한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채권자가 돈을 지불했을 때 빚을 말소해 버리고 그에게 채무소멸 증서를 주는 채권자를 암시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를 용서 하실 때, 그는 빚을 말소시키고 그 위에다 그리스도의 피의 붉은 줄을 긋고 부채 장부에 사선을 그으신다.


(3) 죄를 용서 한다는 것은 이것을 덮어주는(to cover it) 것이다.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시 85 : 2)라고 하였다. 이것은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에 예표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덮어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4) 죄를 용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다(to cost into)는 뜻이다.

이것은 죄들이 우리를 심판하러 일어나지 못하도록 눈에 보이지 않게 매장해 버리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 : 19)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 떠오르는 콜크 병마개처럼이 아니라 밑바닥에 가라앉은 납덩어리처럼 던져 버리는 것이다.


(5) 죄를 용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들을 구름처럼 흩어지게(Scatter) 하신다는 것이다.

"네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 : 22)라고 하였다. 죄의 구름, 즉 중간에 끼어드는 구름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춰 들어오도록 흩어버리는 것이다.

4) 죄의 용서가 포함하고 있는 성격은 무엇인가?


(1) 죄의 용서는 사망을 면하게 해준다.

죄의 댓가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 : 23)라고 기록한다. 죄의 댓가는 분량의 대소와 관계없이 죽음에 이르는 것이며 따라서 죄 용서함이 필요하다. 죄의 용서는 영생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2)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고, 은혜로 받는다.

하나님은 채권자가 채무자를 댓가 없이 용서할 때처럼 용서 하신다. 우리의 기도도, 눈물도, 또는 선행도 용서를 매입 할 수없다. 마술사 시몬이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사고자 했을 때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지어다"(행 8 : 20)라고 베드로가 말했다.


(3) 죄의 용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당연히 받게 하는 외부적인 원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 : 7)라고 하였다. 무한한 가치를 가진 주님의 피 외에는 아무 것도 용서를 산출 할 수 없다.


(4) 죄는 회개하기 전에는 용서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 24 : 47)라고 하였다. 회개 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모두 용서 받기 이전에 일어나야 할 일 들이다. 하나는 통회(Contrition), 고백(Confession), 그리고 회심(Conversion)이다.


회개의 첫 번째 요소는 통회(Cintrition)이다.

통회 또는 아음이 상함에 대하여 성경에는 "다 각기 자기 죄악 까닭에 골짜기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겔 7 : 16)라고 하였다. 이 통회 또는 마음의 찢어짐은 때때로 가슴을 치는 것으로 표현되고(눅 18 : 13), 때로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것(시 6 : 6)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모든 겸비가 다 통회는 아니다. 아합이 스스로 겸비 하였을 때 그의 옷은 찢었으나 그의 마음은 찢지 않았다.

회개의 두번째 요소는 고백(Confession)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 : 4)라고 하였다. 고백은 침해를 당한 당사자인 하나님에게만 행해져야 한다.

고백은 억지 없이 자유로워야 하고, 거리낌 없이 솔직해야 하며, 위선 없는 진심이어야 한다. 이것은 죄 용서의 길을 열어준다.

회개의 세번째 요소는 회심(Conversion)이다.

이것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겔 18 : 31)라고 하였다. 탕자는 방탕 생활의 길에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서 그의 아버지에게로 갔다(눅 15 : 18). 이 회개는 용서로 통하는 즉각적인 길이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 하시리라"(사 55 : 7)고 하였다. 회개는 조건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회개한다고 용서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개 없이 용서 하시지도 않는다.


(5)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책과 형벌을 면제하신다.

죄책이 면제될 때 형벌도 역시 면제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용서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부성적인 노여움을 살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의 법정적인 진노는 제거 된 것이다. 비록 매를 때리실지는 몰라도 그래도 저주(Purnishment)는 제거 하신다.

징벌이 성도들에게 닥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멸망은 오지 않는다.


(6) 죄의 용서 후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내가 저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 : 12)고 하셨다.


(7) 죄의 용서는 죄의 분량과 대, 소에 관여치 않는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 같고, 주홍 같이 붉으며, 먹과 같이 검고 흉악한 죄까지라도 말소 시키신다(사 44 : 22)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임금은 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그의 채무자를 용서해 주었다(마 18 : 27).


(8) 죄의 용서 가운데 용서 받지 못하는 죄들(Unpardonable Sins)이 있다.

이러한 죄들을 성경은 첫째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 ; "성령을 훼방 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마 12 : 31), 둘째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눅 12 : 10), 셋째로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히 10 : 29)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성령을 훼방하고, 모독하고, 욕되게 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 안에 이것을 용서할 만큼 충분한 자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죄를 범한 자가 용서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9) 죄 용서 받음에 있어서 미래의 죄는 그것들을 회개 할 때 까지는 현실적으로 용서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 하실 때 모든 죄를 용서 하신다. "그들의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다."(렘 33 : 8),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 : 1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 103 : 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신다고 말할 때 이것은 과거의 죄에 관한 것으로 이해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장차 지을 죄는 예수님의 공로 가운데 용서의 효력이 포함되어 있지만 미래의 죄는 그것들을 자신이 통회하며 회개할 때 까지는 현실적으로 용서 받은 것이 아니다.

죄가 범해지기도 전에 용서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우리의 과거의 죄들과 미래의 죄들이 한꺼번에 용서 받는다면 그러면 죄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무엇인가?

과거의 죄는 물론 미래의 죄도 용서 받았다는 견해는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빼앗아 가며 무효로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는 매일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변자이시다("…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 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 : 1).


(10) 죄의 용서가 있기 전에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선행 되어야 한다.

신앙은 필연적으로 죄 용서를 선행한다.

"…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 : 43)고 하셨고,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 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좌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 : 15)고 하였다.


(11) 죄의 용서는 성령에 의하여 위임된 용서이다.

성령님은 죄 용서의 사실을 한 영혼에게 알게 하실 때에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하신다. 그 하나가 내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가 외적 방법이다. 이것은 인간 구조의 이중적(二重的) 본성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내적 방법이란 곧 구원 받은 심령 속에 성령님이 내주(內住 : Indewelling) 하셔서 감동과 영적 느낌으로 알게 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고개를 들고 일 어설 때가 많다.

성령님은 외적으로 교회의 거룩한 권위가 위임된 형제 자매들을 통하여 사죄의 사실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용서의 사실을 알게 하신다.


(12) 죄의 용서는 교제(fellowship)에 의한 용서이다.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들과 교제 할 수 있는 자리에 참예 해야 한다. 그 교제는 생명의 빛 안에서 갖는 참된 교제이다.("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 1 : 7). 영적 신앙의 중요한 표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교제 없는 곳에 승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현재적 교제가 있어야 하듯이 형제와 형제 사이에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필요 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성도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 할 것이니…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만일 내가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고후 2 : 7-10)이라고 교훈하고 있다.



4.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우리가 우리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기서 전자가 앞서느냐? 후자가 앞서느냐? 전자가 후자에 의존하느냐? 후자가 전자에 의존하느냐? 하는 질문이 나온다.

다시 표현하면 수직 관계와 수평 관계 상호간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다섯째 청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청원은 근본적으로 이미 용서 받은 청원이다. 말하자면 이 청원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자가 다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때 어떤 자세로서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어디까지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의 권리나 조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기도문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이 어떤 자세로 서야 할 것인가를 강조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이 청원이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다섯째 청원은 하나님의 용서(수직적 차원의 용서)와 인간 상호간의 용서(수평적 차원의 용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청원의 후반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 용서 청원과 우리 인간 상호간의 용서가 서로 병행을 이루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 후반부가 전반부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가르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석을 마태복음 18 : 21-35에 나타 나 있는「악한 종의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본래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하나님에게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었던 채무자들인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탕감을 받은 자들임을 강조한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은 자는 자신에게 사소한 빚진 자를 용서 하므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그의 삶을 통해 반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의 심판이 그들에게 뒤 따른다는 사실을 각각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 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다섯째 청원을 통하여 자신의 완전한 의와 구원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죄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매일 매일의 생활이 회개와 용서를 비는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용서를 자신의 삶 을 통해 반사 하므로써 그의 주위가 용서받는 세계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 왜(Why)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1)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는 모든 기도의 출발이고 신앙생활 성화의 기초이고,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매일 구하듯 일용할 용서(Daily Forgiveness)도 매일 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는 이미 지적 한대로 마태는 "빚", "부채", 누가는 "빗나가다"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다섯째 청원을 원문의 뜻을 다치지 않고 연결시켜 보면, "날마다 죄(빚진 자)를 오늘 탕감하여 주신 것같이 날마다 우리의 죄(빚)도 탕감 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수 있다.「알렉산더 맥글라렌」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빵이 필요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날마다 용서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육신의 떡의 갈급한 필요를 날마다 가지고 사는 것처럼 내 영혼에 하나님의 용서가 날마다 실현되도록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많은 빵의 필요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


2) 죄의 용서는 적은 것에서부터 아무리 큰 죄라도 범죄의 내용에 관계없이 용서의 범위 안에 두셔서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과를 멀리 옮기셨고 (시 103 : 12),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과 같이 되리라"(사 1 : 18)라고 하셨다.「주홍색」은 헬라어에서「두 번 담갔다」는 뜻이 있어서 인간의 기술로는 그 물감을 다시 씻어낼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색 물감을 들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 하시고 죄를 씻어 주신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임금은 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그의 채무자를 용서해 주었다(마 18 : 27). 한 달란트는 삼천 세겔의 중량이며, 일만 달란트는 거의 십이톤의 금을 함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구름처럼 흘어지게 하시고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사 44 : 22)라고 하셨다. 죄를 용서하심의 크기와 내용에 관여 하지 않으시므로 우리가 완전히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롬 1 : 1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롬 5 :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 : 1),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 39)는 확증과 함께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롬 8 : 15)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의 용서를 구하는 삶은 자신이 사죄의 축복을 날마다 더 깊이 체험하므로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마음속에 두근거리는 떨림을 가지고 살아간다. 천둥소리에도 놀라고,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으로 살아간다. 요한 사도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름이라"(요일 4 : 18)고 하였다. 형벌(Torment)이라는 헬라어 용어 콜라시스(κολασις)는 때때로 지옥(Hell)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두려움은 그 속에 지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발걸음마다 체포당할까 두려워하고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은 오늘밤 죽음이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죄의 깊은 은총과 함께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간다.


5) 그리스도인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계속 저주하는 생활을 할 때 자신의 건강과 생활에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 갔나 이다"(시 109 : 17-18)라고 저주를 금하지 않는 댓가에 대해서 고백 했다. 용서는 저주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건강제이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할 때 제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용서 할 수 없는 상대방을 축복하고 용서를 먼저 구할 때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다.(요한 3:2),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4),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딤후 3:3)라고 했다.

용서는 곧 원통함과 저주스러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은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평안을 빼앗기고, 그것이 병이 되어 건강을 잃고 만다. 용서를 통해 맺혔던 모든 것을 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영혼의 치유는 사죄(용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용서는 내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고, 용서에 이른 후에야 건강한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


6)「용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라고 했다. 사랑은 용서라는 나무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7) 도무지 용서 할 수 없는 대상 일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6. 왜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죄 용서가 절대적이고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1) 죄 용서에 대한 확신(Assurance)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는 죄가 우리 양심과 하나님의 비망록에서 지워진다는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사죄의 확신의 결과는 내적인 심령의 평안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

죄 용서 받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죄의 값인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음을 확신하는 삶을 살아간다.

죤 브라운(John Brown)은 "사는 날까지는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사죄를 위해 처음 했던 그대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을 간구하는 자로서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격려시키며 인내하게 하며 담력을 준다.


2) 사람들은 절망(despair)에 빠져서 용서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죄는 너무나 많고 흉악하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다"(렘 18:12)는 행위와 같다.

절망은 소망에 이르는 핏줄의 동맥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 마귀는 죄를 더 크게 보여주어 영혼을 계속 정죄하는 절망의 죄에 빠지게 한다.

절망의 절규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자신이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영혼을 정죄하는 죄를 낳게 된다.



7. 용서하고자 해도 상대방이 용서 받기를 원치 않을 때, 또는 끝까지 거절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권면을 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그 권면의 성격은 어떠한가?


1)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덕을 세우며 피차 권면하며 …" 고전 14:3)


2)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도 난 것이 아니요" 살전 2:3)


3) 바른 교훈으로 해야 한다.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딛 1 : 9)


4) 한 두번 훈계 한 후 멀리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 한 후 멀리하라" 딛 3 : 10)

여기에「이단」이라는 표현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안에서 교제를 원치 않고, 우리가 아닌 다른 집단에 속하려는 사람들을 의미 한다.

그가 모든 그리스도 안의 성도들과 사랑과 용서와 교제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고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라고 하셨다.

우리가 용서를 먼저 구하고 집단 안에서나 개인적으로 진정한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해야 할 일이다.



8. 어떻게(How)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 안에서 예수님 이 우리를 용서 하신 것을 배울 때 가능하다.


1) 끊임 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

베드로가 용서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을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2)라고 하셨다. 이어서 빚을 탕감 받는 자의 용서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2) 진실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회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 : 35).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기도는 "…그 기도가 죄를 면케 하시며"(시 109:7)라는 양심의 가책 없는 기도의 결과를 초래한다.

진심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배 할 수가 없다("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진심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사람은 오늘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로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야 염치 있고 양심 있는 신자이다.


3)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한다. 이 용서는 조건이 없는 용서이다. 성경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 103:3)라고 했다.

주기도의 본문에서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 중에 "사한다(Forgive)"는 동사 아페이나이(αφιεναι)는 헬라어 성경 마 4:22에 나오는 단어와 똑같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그를 따르기 위해 그물과 배를 「내버렸다」. 이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를 주기도문에서도 같은 헬라어로 사용하고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내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쓰레기통에 찌꺼기들을 버릴 때는 미련을 갖지 않고 완전히 버린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는 쓰레기를 담고 고약한 냄새와 함께 산다. 어떤 쓰레기를 조금 뒤에 버린다고 남겨 놓을 때 더러운 냄새는 계속 제거할 수 없다. 버릴 것은 완전하게, 깨끗하게 버리는 것처럼, 완전하게 용서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실 완전하게 용서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계속 치밀어 오르는 분노,계속 용서 할 수 없음에 대한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배우라. 그리고 하나님이 완전히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 보라. 그렇게 할 때 자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었던 모든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


4) 무조건 용서 해야 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이여야 하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한다 (고전 13:5).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다(고전 13:7). 이런 사랑의 바탕 위에 세워질 때 그 용서는 무조건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할 때 화목과 화해의 두 기둥 위에 두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조건 용서 하려고 할 때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성령의 깨우침을 주신다.


5) 용서를 구할 때 우리의 언어는 빛 가운데서 숨김이 없는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하듯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까지도 성령님께서 주장하시도록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 "어쩌면 제게 잘못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게 잘못이 있다면…" 하는 식의 표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잘못 했다고 깨우쳐 주신 것은 솔직히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한 잘못을 감소하거나 적당히 넘어 가려고 해서는 안된다. 대개의 경우 용서라는 말 대신 솔직하지 못한 다른 넋두리나 답변을 하기가 일쑤이다.

가령,"아,뭐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혹은 "저도 잘 모르고 했는 걸요, 뭐" 또는 "별 걱정을 다 하시는군요. 너무 염려 마십시요" 등은 용서를 구하는 바른 태도라 볼 수 없다.

또한 잘못된 고백으로 우리의 죄를 가볍게 하거나 상대방을 무색하게 하는 때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가령 "우리들이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꼭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당신도 (이런, 저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저도...(진짜 잘못을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임)" 하는 식의 말투나, 또한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저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별로 큰 잘못을 범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냥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는 상대방이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든지 아니든지 상관이 없다는 말투이다.)" 라는 식의 말투도 바른 태도라 볼 수 없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성령께 의지해서 정직한 태도로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용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잠 29:20)의 자리를 피하는 삶의 지혜를 간구 할 때 이 청원은 더욱 그 빛을 드러 낼 수 있다.


6) 가시 돋힌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가시 돋힌 용서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000씨가 권하니까 일단 용서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준 상처는 결코 잊지 못할꺼야"라는 식의 용서이다. 이것은 용서가 될 수 없다. 무디 선생(D.L Moody)은 이것을 "고슴도치 용서"라고 했다. 메튜 핸리 (Matthew Henry)는 "겉으로는 평화스럽고 화해 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으나 용서에는 적의를 품어서도 안되며 누구에게 악한 감정을 가져서도 안된다. 어떤 형 식으로든지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고 화나게 한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하며 추구하는 마음의 자세 가 아니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보이고, 또 화평한 것 같이 보여도 중심 에는 악한 감정이 있거나 불만이 있거나 시기 질투에 의하여 상대를 나의 중심에서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그 용서가 모두 가시 돋힌 고슴도치 용서인 것이다.


7) 상대방을 진심으로「이해」해 주려는 태도를 통하여 용서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해」라는 용어는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한다. 이 단어는 아래 선다 라는 말이다. 겸허하고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려울 때, 곤경에 처할 때 그런 입장이나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8) 용서는 용서한 후 용서 할 수 없었던 모든 사실을 잊어 버려야 한다.

스펄존 목사는「용서」에 대하여 아주 유머러스하고도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였다.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 위로 기념탑처럼 남겨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라고 한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던 것으로 본다. 버림받고,제 구실도 못하고, 위험하기 까지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 버려야지 땅 위에 꼬리만 남겨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죄를 용서한 후 완전히 잊어 버려야지 일부분을 다시 기억하고 남겨 놓아서는 안된다. 잊어버리지 않는 용서의 꼬리들이 이곳 저곳에서 흉한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들이 사라져야 한다.


9) 용서는 믿음으로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통해서 용서가 실천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신앙이 성숙 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비례한다.

믿음의 대 헌장을 기록한 로마서 1:17은 모든 사람이「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비결은「오직 믿음」으로 가능케 됨을 언급 했다.「용서」가 점점 부재 되어가는 탁한 세상에서「믿음으로 사랑」하여 용서할 수 있는 진실하고 용기 있는 용서가 필요하다.


10) 용서를 베푸는 삶을 생활화(습관화) 해야 한다.

(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건강한 정서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복음 전도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요소이다.

(3)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교회 생활에 성도간의 교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4)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공적인 결혼 생활과 건전한 가정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5)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능력 있는 기도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6)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령 충만한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7)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믿음의 담력을 갖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8)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용서의 삶을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9)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영혼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0)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겸손과 온유한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사단 마귀의 영역을 좁히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결 론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실현된 용서의 복음 이다.

인간을 위한 두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 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청원 이 차지하는 문맥의 위치(Where)와,죄는 무엇이며(What),죄를 용서해야 할 이유(Why), 또한 용서를 구하는 삶은 어떻게(How) 하느냐에 대해서 질문 형태로 살펴보았다. 죄인을 위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전부를 준 것이었고 그 용서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마 6:14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주기도의 정신과 생활화가 신자들의 의식구조 속에서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가 하는 필자의 연구 논문의 사례에 67.2%가 긍정적인 응답을 보여 주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10명 중에 3-4명은 용서의 하나님과 사는 삶과는 거리가 먼 증오하는 마귀와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증오의 마귀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해치며 성도의 가정과 그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 영혼은 불안과 슬픔으로 지옥처럼 채우고, 교만과 오만으로 사단 이 춤을 추는 무대장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마귀는 한 길로 왔다 열 길로 도망갈 것이고 용서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이 된다. 날마다 양식(DAILY BREAD)를 구하는 것처럼 날마다 용서(DAILY FORGIVENESS)를 생활화 하여 우리가 "오늘은 내가 죄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롭고, 마음이 편안치 않다."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맑고 솔직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양심의 가책 없이 이 청원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직한 신앙의 척도는 용서의 삶을 삶의 현장에 옮겨 그 곳에서 생활화 하고 실천하는 현재와 미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다 섯 째 간 구


1. 네번째 간구와 다섯번째 간구의 두 청원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은 무엇인가?


2. 다섯번째 청원에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연결어인 "그리고"라는 연결어구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신약 성경에 헬라어에서 죄와 관련된 용어 등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4. 마태와 누가 복음의 주기도문에서「죄」에 대하여 헬라어 성경은 어떻게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가?


5. 왜「죄」라는 어휘가「빚」이란 뜻과 상관관계를 가지는가?


6.「죄」가 빚으로써 갖는 성격은 무엇인가?


7. 주기도문의「죄」가「빚」이라는 성질에 대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8. 우리의 빚「죄」은 어떻게 청산 할 수 있는가?


9.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10.「죄」용서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11.「죄」의 용서가 포함하는 성격은 무엇인가?


12.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우리가 우리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13. 왜 우리가 서로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14. 죄 용서가 절대적이고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15. 용서 하고자 하는 사람이 용서 받기를 원치 않을 때, 끝까지 거절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16. 어떻게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는가?






기도에 관한 명상


만일 우리가 죄를 용서 받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은 도살용 양을 살찌게 하듯이 우리를 살찌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메튜 헨리, Matthew Henry)



여섯째 간구(The Sixth Petiton)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마태복음 6장 13절 -




서 론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간구(The Sixth Petition)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이 간구의 위치는 우리의 청원(We-Petition) 마지막에 있다. 우리의 청원(We-Petition) 다섯 번째 청원에서 다루었던 용서의 간구는 지난 과거의 죄의 해결함을 위한 것이지만 시험에 들지 않기를 원하는 간구는 미래에 범할 수 있는 죄의 예방이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현재 당하고 있는 악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이다.

우리를 위하는 세 가지 간구 가운데 첫째 간구인 매일 양식(Daily Bread)은 육적인 것임에 대하여, 둘째 간구는 매일 용서(Daily Forgiveness)이고, 셋째 간구는 시험과 악으로부터 매일 보호(Daily Preservation)를 원하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의 두 주기도문을 비교해 보면 누가 복음에서 하나님에 관한 기원 중 셋째 기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생략 되어 있다.

우리를 위한 간구에 있어서도 누가 복음은 셋째 간구의 하반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생략 되어 있다. 즉 전자는 자율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 후자는 타율적인 면이 보여진다. 죄 혹은 시험 (Temptation), 즉 악은 우리에게서 매일 제거 되어져야 하는 요소들 이다.

웨스트 민스터 요리문답은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가? 에 대하여 그 답을 이렇게 정의한다.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는 곧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혹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아니하게 하시거나 시험을 당할 때에 보호하여 구하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라고 했다.

이제 우리의 영혼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관관계를 밀접하게 가지고 있는 시험과 악에 관한 간구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접근을 해 본다.


1) 주기도문의 넷째 간구와 다섯째 간구 사이, 또 다섯째 간구와 여섯째 간구 사이를 접속사 '그리고'(Kai; 카이)로 연결하고 있는데('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 다섯째 간구가 자율적인 것 즉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용서라면, 여섯째 간구는 타율적인 것 즉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이나 악"에 대한 간구라는 점에서 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매일 죄를 용서하심과 구원함에 대한 것이다. 매일 사단과 악에서 구원해 주십사는 간구는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인간을 구원함에 있어서 계속적이며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 때문이다.


둘째 : 다섯째 간구는 구원의 서정(行定)에서 정의(Justification)의 소극적인 측면과 연결 된다면 여섯째 간구는 구원 서정에서 성화(Sanctification)에 관계된다. 이 두 가지는 구원 얻은 이후의 신자의 삶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고 매일 매일 계속 된다는 것을 구원의 서정에서 교리화 하여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 다섯째 간구는 죄의 유전성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구하는 간구이지만 여섯째 간구에서는 죄의 오염과 그 영향 아래 지배당하게 하는 시험과 악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 힘, 권능으로 인하여 구원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주기도문의 여섯째 청원에서 마태의 본문에 "다만" 이라는 번역을 헬라어 성경은 "알라"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서로 연결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의 본문에 접속사 "알라"(αλλα)는 영어에서 그러나(but)이고, "메(μη)는 아니다(not)라는 단어를 취하여 영어의 구문서 not…but의 형식을 사용하여 여섯째 간구를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구문에서 알라(αλλα)는 문장의 절(Clause)이나, 전 문장의 경우에 있어서 앞에 나온 것과의 차이나 혹은 대조를 나타내는데 쓰는 반대적 의미의 불변사로서 "그러나"의 뜻을 가지고있다. 이것은 앞의 부정문에 이어서 긍정문을 이끌 때는 대조를 나타내면서 영어, 구문에 "not only…but also, … 뿐 아니라,……도 또한"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섯째 청원의 전반절에서는 소극적으로, 후반절에서는 적극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다만"은 "도리어", "그러나", "또한"의 의미도 포함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섯째 간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실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또한, 도리어), 악에서 구하옵소서(승리하게 해주옵소서)라고 그 뜻을 더욱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소극적인 간구와 적극적인 간구가 한 간구 가운데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즉 우리는 본성적으로 연약하여 시험(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도 있고 거기에 빠졌을 때, 우리 스스로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요청하는 간구이다. 여기서 접속사 알라(αλλα)를 사용하여 연결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이고 두 조문을 한 기도로 생각 할 수도 있으나 각각 독립된 간구 (Petition)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누가의 주기도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독립된 두 간구라는 표현도 동의할 수 있지만 두 조문을 한 간구(Petition)로 다루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3)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청원과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13절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 하시고,친히 아무도 시험 하지 아니 하시느니라"(약 1 : 13)라는 말씀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야고보서 기자와 여섯 번째 청원의 표현과의 상관관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야고보서 기자의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라는 기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 하며"(시 78 : 41)라고 기록된 사실 간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우리를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주기도의 간구와, "친히 아무도 시험(Temptation) 하지 아니 하시느니라"(약 1 : 3 下) 라는 표현은 서로 자연스러운 접촉점을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무도 시험하시지 아니 하시느니라"(약 1 : 13 下) 라고 기록된 것과 다르게 만일 "친히 아무라도 시험 하신다면" 그분의 성결성 또는 지선성(至善 性)은 무너지고 만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경우에도 하나님 자신이 친히 범죄 하도록 유혹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악으로 사람을 시험(Test) 하지 않으신다.〈이렇게 말씀 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試驗, Test)코자 하심이라. 요 6 : 6, 그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시려고… 창 22 : 1>.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Test)과,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시험(Temptation)은 다르다.


(1)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의 출처는 하나님께로 오며, 마음 밖에서 오며, 하나님의 목적에서 승리하게 되며,신앙의 연단 혹은 단련("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 : 1)을 하시기 위함이다. 즉 우리를 더 유익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시는 시 험이라고 간주 한다.


(2)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시험(유혹,Temptation)의 출처는 마귀에게로서 온 것이며,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사람의 욕심("오직…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 약 1 : 14)에서 나며,패배 하기 쉽고,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악에 빠지게 하기 위한 유혹(to solicit into evil)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Temptation)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에서 나타나듯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와 공모 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이끌리어 죄를 짓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죄 짓는 책임을 아담처럼 타인에게 전가 시키며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 : 12),자신의 타락한 본성("욕심이 잉태 한즉 죄를 낳고…" 약 1 : 15)을 부인 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악의 유혹에 이끌리어 짓는 죄를 시험(Test) 즉 신앙 연단으로 수용할 수 없을 경우 비난의 화살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자신을 변명 하려고 한다. 그러나 변명의 자리에 계속하여 설 수 없음을 야고보 기자는 약 1 : 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욕심에 끌려 비롯됨이니"라는 말씀으로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낼 줄 아는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이 여섯 번째 청원을 진정으로 드리는 간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Lead us not into temptation)


여섯째 청원은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의 마지막 청원으로 마태복음에는 전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그리고 후렴으로 나오는 후절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로 연결 되지만 누가복음에는 전절만 기록되어 있다. 이 마지막 청원의 전반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청원의 핵심적인 단어가 되고 있는 "시험"(πειρασμος)은 무슨 뜻인가,또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하고 있는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주기도문에서 이 "시험"이란 말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주기도의 마지막 간구에 나오는 "시험"은 근본적으로,사단 마귀로 부터 오는 시험(유혹)을 가르치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간구 역시 마귀로부터 오게 되는 시험(유혹)에서의 보호(Preservation)와 승리를 간구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시험"이라는 단어를 마귀의 사역과 관련해서 자신을 대적하고 시험하는 자들을 가르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의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 : 44)고 말씀하시었다.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시험(Temptation)은 일반적인 신앙 연단을 위한 시험(Test)을 뜻하기 보다는 특히 사단으로부터 오는 단외적인 시험을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기도문 본문과 똑같은 형식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적용하신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여섯째 청원의 후렴으로 나타나고 있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그 "악"한 것에 관련시킬 때 그 시험은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주기도문의 연구가인 예레마이어스(Jeremias)는 그의 저서 "The Prayer's of Jesus" 105쪽에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은 시험으로 부터의 보호를 뜻하기 보다는 오히려 시험 안에서의 보호(The Lord's Prayer is indeed not to preservation from temptation but to preservation in temptation)를 뜻하고 있다" 라고 기록 했다. 여기서 정리하면 주기도문의 여섯째 청원은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뿐만 아니라, 시험 안에서의 보존과 승리에 관한 청원으로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시험" 이라는 어휘는 성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서 시험(Test)이라는 말과,시험(Temptation) 즉 유혹과는 분명하게 서로 구별 된다. 원문에는 어근이 같지만 의미는 다르게 적용 된다.

예레마이어스(Jeremias)는〈신약 성경에 "시험하다",(페이라죠,πειραξω)라는 동사는 38번 기록되고,"시험"(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ος)이라는 명사는 21회 사용 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 "시험"이라는 어휘는 성경에 두 가지의 뜻, 즉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적용 된다. 어느 특정 어귀에서는 둘 중 어느 의미가 적용되는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지만 분명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 : "시험"은 어떤 사물의 성질을 조사,또는 …의 강도를 검사해 본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이나 신앙 등의 진정한 충실성,신실성 등을 살펴 보는 것 즉 Test,Examine, Prove 등을 뜻한다. 시험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경우 이든지,또는 사단에게 허용 되어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왜 하나님(예수님)께서는 때때로 그 자녀들을 시험하시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창 22 : 1) 하셨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과 충실성과 신실성을 시험(Test,Examine, Prove) 하시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교리적으로 적용시키면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히 11 : 17) 라고 기록 한다.


(2) 하나님께서 어느 한 사람을 합법적이고도 선한 방법으로 그가 현재 어떤 사람인지,앞으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는지를 시험 하시고 자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을 시험(Test) 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말씀 하심으로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 6 : 6)"고 기록한다.


(3)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 것은 우리가 항상 깨어 성령 안에서 기도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 : 1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 밖에 없으셨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시험을 피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기도하면 그때마다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길로 가게 하신다. 혹시 "내가 지금 시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체 말고 기도 해야 한다. 내가 요즈음 시험 앞에 망설이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시험을 안겨 줄 수 있는 어떤 불안한 요소 앞에서도 기도의 무릎을 끓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는 자를 돕지 않으신다. 주님이 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가? 기도 외에는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무도 시험에 빠지는 일이 없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형편을 너무 잘 아시고 시험에 빠지기 전에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 하게 하시고,시험에 빠진 다음에는 주저 말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 것은 영적 무장의 중요성과 가치를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만일 우리가 소홀하게, 부주의하게 영적인 무장 없이 영적 전쟁터에 나간다면 큰 피해와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종말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 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고 시험을 이기는 영적 무장의 방법을 영적 갑옷으로 비유하여 구체적이고도 입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5)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 (Test)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게으름을 고쳐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부지런하심은 우리를 새벽부터 깨우시는 열심을 가지셨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 : 8)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엡 5 : 14)라고 하신다. 우리가 신앙의 게으름과 영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악한 자들에게 악한 일들 을 허용하시어 연단시키신다.

(6) 하나님은 그의 약속 하심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시고 인간 편에서 그 의무를 시행할 때 하나님을 시험 (Test)할 수 있음을 가르켜 주시기 위함이다.

말라기서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試驗) 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 하나 보라"(말 3 : 10)는 말씀으로 확인 시키고 있다.


(7)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할 때 그의 진노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인간)의 이러한 행동과 결과에 대하여 성경은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 하였도다" (시 78 :41)라고 기록한다.


(8)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인간이 범죄 하도록 유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그를 범죄 하도록 유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Test)하신 것이다. 그는 그 시험에 승리하여 믿음 의 조상 이라는 댓가를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시험은 우리를 범죄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유도 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보다 주님의 쓰임에 합당한,귀히 쓰시고자 하는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고 만들어 가신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신다"(잠 17 :3)

(9)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입학 시키시기 전에 땅에서 천국학교에 등록하여 연단 받는 학생들 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이 세상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공부시킨 다음에 얼마나 그 실력이 향상 되었는가를 시험을 치루어 확인 한다. 그리고 잘 했을 때에 상급이 있다. 천국학교 훈련생들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하나님께서 000을 시험 하시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상급)을 주신 것처럼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 하실 때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당한 것이 없다”(고전 10 : 13)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시험 하신다. 가령 국민학생에게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내어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수준에 맞는 시험을 주셔서 그 댓가를 상급으로 보상하신다. 우리의 천국의 주인이시고, 교장이신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좋은 점수를 받게 될 때 믿음의 연단이 정금보다 귀한 믿음이 되게 하시고 신앙의 참 보람과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를 알게 된다.


(10)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그의 주권 아래 절대적으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때문에 이 간구에서는 모든 시험을 좌우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11)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섭리 자체가 선하신 데 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우리가 죄(악)에게 기회를 줄 때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시험을 허 용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없는 죄인 된 인간들이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할 때, 우리가 자기만족에 처했을 때 우리는 히스기야가 치한 상황처럼 그렇게 될 수가 있다(대하 32 :27-31).


(12)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시험 받도록 묵인하시는 것은 그들이 교만해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교만은 천사들에게 들어가 타락하게 했고 베드로 안에 있었을 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 : 33)라 는 고백을 하게 했다. 이것은 마치 그가 모든 사람들 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던 것처럼 자신 있게 한 말이고 교만한 행동이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고후12 : 7)라고 하였다. 바울이 계시로 인하여 높아졌을 때 그는 교만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때 사단의 사자가 와서 그를 괴롭혔으며, 그것은 그를 겸손케 하는 어떤 쓰라린 시험이었다. 하나님은 교만을 대항하시고 그의 자녀들을 겸손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그들이 때때로 시험에 빠지는 것을 묵인 하신다. 그리스도인 된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의무보다는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시험이 더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3)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시험 받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어려움과 문제에 처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리고 사람들 에게 적합한 언어와 행동을 나누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바울은 시험의 검술 학교에서 잘 훈련된 사도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신자)에게 사단의 간계와 전략을 전해 줄 수 있었다(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2 :11).


둘째 : “시험’’이란 다른 적용은 인간을 어떠한 욕심에 이끌리게 하여 악한 죄에 빠지게 하도록 유혹 하는 데 있고, 그래서 죄의 유혹으로 “꾀인다.” “악을 행하도록 유혹(Temptation) 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예레미아스(Jeremias)에 의하면〈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ος)의 명사형 가운데 딤전 6 :9 에서만 "유혹"(Temptation)의 뜻으로 쓰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험”(Test, Examination)의 뜻으로 쓰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풀이 할 수 있는 어휘인지라 이에 대한 해석과 번역 자체도 다양하며 이 어휘에 대한 개념을 다 포함하는 한 단어는 없다. 이 어휘가 적용되고 있는 성경을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마귀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이나, 제자들과 신자들을 시험한 경우가 있다(마 4 :1, 히 2 : 18).


(2)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들이 예수님과 사도들, 신자들을 시험한 경우가 있다(마 16 : 1, 막 8 : 11, 행 20 : 19).


(3)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 즉 의심이나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행 5 : 9, 고전 10 : 9, 히 3 :8)


(4) 인간이 욕심이나 정욕으로 인해 시험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전 10 : 13, 갈6 : 1, 벧전 1:6, 벧후2:9)


이처럼 분류해 볼 때 “시험”은 신약에서 여러 방면에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어휘는 마귀의 사역과 관련해서 사용되거나 혹은 예수님을 대적하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및 헤롯 당원들과 관련해서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는 시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악한 자(것)들을 동원해서 환난과 핍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험(유혹)을 하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요1서 2 : 16)등으로 우리를 현혹 시켜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입고(요일 2 : 22) 미혹시켜 타락케 하며, 우리 마음 속에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자극해서 죄의 자리에 빠져 머물게 한다. 이러한 유형의 모든 시험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를 유혹하는 시험(Temptation)이고 여섯째 간구는 이러한 시험에서 승리를 구하라고 하신다.


3) 시험(Temptation)은 어디서(Where) 오며 어떻게(How) 오는가?

야고보서 기자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 :14) 라고 기록한다. 시험은 어디서(Where)오는가? 여러 곳에서 온다.


첫째 : 외부에서 오는 외적 시험 즉 유혹이 있다.

베드로전서 5 : 8 이하에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였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한 것은 밖에 있는 마귀의 세력 곧 우리의 인격 밖에서 오는 마귀의 시험을 말하고 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 : 16)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은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현대를 3S 시대라고 한다. (Sport, Speed, Sex) 이것은 메스콤 및 기타 여러 가지를 이용하여 젊은이들의 시각을 통해 마음을 강렬하게 미혹한다. 마약, 알콜중독, 성범죄,가출,이혼, 스포츠의 열기와,저속한 삽입광고,죄 짓기 위해 속히 달려 가는 발, 유산(Abortion), AID-S, 동성연애,혼전 성 경험의 보편화,포르노 그래피(PORNOGRAPHY),등등이고 모든 것들은 세상으로 좇아 온 외부적인 유혹의 산물들이다.


둘째 : 내가 사랑하는 자로부터 받는 시험(유혹)이 있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객관성을 잃고 시험에 빠진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부부사이에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뗄 수 없는 우정을 가진 친구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 날 수 있다. 이 사랑하는 이에게서 오는 시험은 가장 싸워 이기기가 힘들다는 것이 보편적인 입장이다.


셋째 :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시험(유혹)이 있다.

상대방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 요구를 들어주다가 주관성을 잃어버리고 시험에 빠지게 된다. 범법행위, 성적 불륜관계, 가까운 부모 친척 등의 부당한 요구들을 동의 하다가 당하는 시험(유혹) 이다.


넷째 : 나의 내부에서 오는 시험(유혹)이 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은 발견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 만큼 빨리 막을 수 있고 막기가 쉽다. 그러나 내부에서 오는 시험은 그 정체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동시에 언제 어떻게 시험을 하는지 알기도 어려운 때가 있다.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시험에 빠져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시키고 미혹케 한다. 그 중에 대 표적인 것이 물욕, 식욕, 색욕, 명예욕이다.


(1) 어떤 이는 물욕에 약하다. 재물에는 약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돈 이라면 의리와 신의 까지도 저버리고 끌려가는 사람이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 : 10)가 됨에도 불구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아간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므로’’(수 7 :21) 물욕의 시험을 받아 범죄하였다.


(2) 어떤 이는 식욕에 약하다. “에서”는 식욕에 끌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다(창 25:34). 무엇을 먹을까(마 6:31) 염려하는 사람은 매일 양식(daily bread) 즉 넷째 간구 이상을 더 구하므로 식욕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을 모르게 된다(잠 30:9).


(3) 어떤 이는 성욕에 약하다. 삼손은 성욕에 끌리어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다가 죽었다(삿 16 : 30)


(4) 어떤 이의 성욕은 정욕으로 불일듯 하게 한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품은 정욕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녀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다. 정욕으로 오는 내부의 시험은 계명을 범하게 하는데 까지 이른다.


다섯째 : 인간 내부에 약점과 강점 어느 곳에도 시험 (유혹)은 찾아 온다.

인간의 약점은 시험(유혹)을 받게 되는 공격 목표(Target)이다.


(1) 어떤 사람은 시기심이 많은 것이 약점이다.

그 시기심은 자신의 뼈의 썩음(잠 14 : 30)같은 불행한 결과를 일으킨다.


(2) 어떤 사람은 게으름에 속수무책인 사람이 있다.

게으름은 망조의 원인이 되는 사단의 계략이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잠 10 : 4),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6 : 10)고 기록한 지혜자의 기록은 사단의 계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3) 어떤 사람은 정(Mood)에 약한 사람이 있다.

특히 여자들이 정이나, 인정에 약하다. 조심해야 한다.


(4) 어떤 사람은 탐심이 많아 탐내기를 좋아 한다.

탐심은 사욕과 악한 정욕과, 모든 불의 추악, 온갖 더러운 것, 속임, 술취함,호색, 음탕(간음)등과 길 동무이다 (골 3 : 5,막 7 : 22 롬 1 : 29,엡 5 :3)


(5) 어떤 사람은 명예심이 많아 명예욕 때문에 일생을 망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물욕"과 함께 "명예욕"이 머리를 치켜 올렸다. 때문에 하나님 (성령님)을 속이다가 즉결 심판으로 죽음의 비극을 불러 일으켰다(행 5 : 1∼11)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킬레스건(Achillean tendon)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사단은 언제나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연약한 부분을 노린다. 어떤 경우에는 약점을 잘 보강 하고 있을 때 강한 부분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오히려 강한 점이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나 강한 점을 다 잘 관리해야 한다. 시험이 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마귀도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 :7). 또한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을 너무 믿다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 : 12).




2. 다만 악(惡)에서 구하옵소서에 대하여 (But deliver us from evil)


서론 : 주기도문의 여섯째 청원의 후반절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이 후반절을 일곱째 청원(별개의 간구)으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이것을 별개의 간구로 보고 두 간구로 구분하는데,"여섯째 간구(시험에 들지 말게 할 것)는 미래의 죄에 대하여 일곱째 간구(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이미 범 한 죄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라 했다. 반면에 "죤 칼빈 (John Calvin)"은 이 청원의 전반절과 후반절을 한 가지로 보며 오늘날 여러 학자들도 이것을 한 간구라고 주장한다.

"메츠거(Metzger)" 교수는 이 두 절을 "우리를 지키심(Protection)" 이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마태의 주기도문 6장 13절을 두 간구로 보고 전반절은 미래의 죄에 대해서, 후반절은 과거의 죄에 대해서 구함 받기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핸드릭슨(Handricson)과 같이 전, 후반절을 다 미래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본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 외에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와 사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험과 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마태의 주기도문 13절을 아더핑크(A. W. Pink)는 하나님의 은혜(Grace of God)요, 우리에게 매일(Daily)주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 은혜(Grace)를 여섯째 간구에 적용하여 전반절은 방지의 은혜(Preventing grace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후반절은 보호의 은혜(Preserving grace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받아 들여야 하며,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사역을 이 한 간구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우리말 개역본은 "다만"이란 부사로 연결하여 소극적인 간구(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와 적극적인 간구(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한가운데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의 주기도문 6장 13절은 본성적으로 연약한 우리로 하여금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만일 불행히도 그러한 유혹에 빠져 들었을 때는 우리 스스로 빠져 나오기가 어려우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어 달라는 의미의 청원으로서 본문의 후반절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1) 주기도문에서 악(惡)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악(惡)은 "포네루(πονηρου)"라고 헬라어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마 6 : 13의 후반절은 누가의 주기도문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악"이란 어휘이다.마지막 청원의 후반절에 나타나고 있는 "악"이 "추상명사"로서의 "악"(Evil)을 가리키느냐, 아니면 인격으로서의 "악한 자"(THE EVIL ONE)를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가 제기되는 시발점은 "포네루" 앞에 붙은 관사 "투"(TOU)가 남성 관사로 보느냐 중성 관사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리기가 결코 쉽지는 않다. 만약 우리가 이 관사를 남성 관사로 보는 경우에는 그것은 "그 악한 자", 곧 사단을 가르키게 되고, 중성 관사로 보는 경우에는 세력으로 볼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주기도문에 관한 주석을 첫번째로 쓴 사람인 터툴리안 (Tertullian)과 여러 교부들은 "그 악한자" 즉 사단으로 보았지만, 서방 교회의 교부인 암브로스(St. Ambrose)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등은 중성 관사로 취급하여 "그 악"을 죄나 행동으로 간주 했다. 칼빈 (John Calvin)의 경우는 둘 다 가능하다고 하면서 여기에 대한 결론을 유보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오늘날 신학자들의 글과 번역 성경에는 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영역 성경에는 "EVIL"로 사용해 오다가 “THE EVIL ONE"으로 사용하고, 중국과 일어 번역에서도 "악한 자"로 또한 최근에 번역된 성경에 보이며, 거의가 "악"으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경은 개역, 새 번역, 공동 번역에서 다 같이 "악(惡)"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처럼 어떠한 어휘가 번역 성경에 적합한가에 대한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어휘가 성경에서 다른 곳에 사용된 예를보면 요 17:15, 요일 5:18등에서 동일한 “호 포네로스”(ὁ πονηρος)가 모든 “악한 자”로 되어 있다. 또한 마 13 : 19에서는 “악한 자”(ὁ ποηρος)는 분명히 사단을 가리키고 있다. 같은 병행 구절인 마 4 : 15에서 마귀로 표기 되어 사단을, 눅 8 : 12 에서는 마귀로 표기한 점을 주시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현대 신약 학자들은 사단으로 해석 하며 모두 “THE EVIL ONE"으로 다루고 있다. 메츠거(Metzger)는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 "아포"가 "악한 데서 부터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로 부터 구하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했다.

사실 이상의 두 가지는 용어상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상호 일체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거나 행하게 하는 주체 는 바로 똑 같은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 악한자"를 사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절에 나타나는 대칭어휘인 "시험"을 보아서나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이 어휘의 일반적인 용법을 보아서 "악한 자" 즉 "사단"으로 규정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어떤 추상적인 악이나 죄를 가르키기 보다는 모든 악과 죄의 근원이 되고 있는 인격체인 사단을 가르키고 있다. 이 청원에서 "악에서 구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사단에게서 구하옵소서"라는 의미도 되고, "또 범죄 행위에서 부터 구원해 주옵소서"라는 의미도 된다. 칼빈(John Calvin)은 "<악>이란 단어를 마귀로 이해하느냐 죄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바로 사단이 숨어서 우리 생명을 엿 보는 원수이며 (벧전 5 : 8), 뿐만 아니라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죄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공격해 오는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의 의미들은 무엇인가?

이미 우리는 "악"이란 어휘는 마귀(EVIL)즉 사단을 가리키지만 악한 자나 악한 것으로 적용시킬 수 있음을 다루어 보았다. 이런 뜻에서 토마스 스콧트(Thomas Scott)는 "우리는 모든 종류와 모든 정의와 모든 경우의 악으로부터 어두움의 세력의 악의 힘과 교활함으로부터; 이 악한 세상과 그 모든 유혹, 함정, 분노, 기만으로 부터; 그것이 억제되고 정복되고; 종국에는 근절되도록 우리 마음의 악으로 부터; 고통의 악으로 부터;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라고 했다. 이 청원에는 표현된 것보다 더 많은「악」의 요소들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1) 우리가 "악에서 구하읍소서"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죄의 악(THE EVIL OF SIN)으로 부터 구출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막아 달라고 기도하는 치명적인 악이다. 죄는 얼마나 소름끼치는 악인가?

① 죄는 그것의 기원(ORIGIN)에서부터 악하다. 죄는 그것의 족보를 지옥에서 이끌어 내온다. 이것은 마귀에게서 나오며 (요 8 : 44), 마귀의 아버지라 부른다.

② 죄는 그것의 본성(NATURE)에서부터 악하다. 죄가 악명을 가지고 있음은 성경에서 언급한다. 죄는 그 본성에서 악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 거역하는 위반이기 때문이다. "죄는 불법이다"(요일 3 : 4)라고 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의 행위이다. 죄는 사단을 만족시켜 주고, 사람들의 죄는 마귀에게 잔치 대접을 한다. 죄는 온갖 더러운 것을 오염시키는 오염물과 같다(고후 7:1). 죄는 우리의 명예와 자녀의 영광을 저하시킨다(시 49 :70). 죄는 사람들을 마귀의 종으로 만들어 노예화 시킨다.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그는 마귀의 하인이며 그래서 그의 악한 심부름을 하게 된다. 죄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악한 계획을 성취하는데 많은 노력과 고통을 지출케 하는 고통(painfulthing)스러운 것이다("악을 행하기에 수고 하거늘" 렘 9:5). 죄는 무엇이든지 더럽힐 뿐만 아니라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래서 "악인 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57 : 21)고 말씀 한다.

③ 죄는 경건한 자(GODLY)의 판단과 견해에서 볼 때 악이다. 그러면 이것이 가장 엄청난 악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를 선택 하였다.

④ 비교(COMPARISON)에 의해 죄를 판단하면 가장 치명적인 악으로 나타난다. 치명적인 악을 죄의 삯인 사망(롬 6 : 23)과 죽음 후의 지옥의 심판과 비교해 보자. 죄를 그것의 참담한 결과에서 바라보라. 그것은 진저리나고 터무니없는 악으로 나타난다. 둘째 사망을 참고 (계 21 : 8) 해보아도 알 수 있다.


(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악(the evil of your heart)으로부터 또한 악한 마음(an evil heart)으로 부터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악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기도할 때 이 악이 우리를 죄 짓도록 유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최대의 유혹자이며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말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 : 14)라고 하였다.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 할 것이요"(히 3 : 12)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악을 허락하면서 사단(악)에게 비난을 퍼붓는 일은 정당한 일일 수 없다. 우리 마음의 악을 제거하는 삶을 위해서는 자기 욕심에 이끌리는 모든 유혹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한다.


(3) "다만 악에서 구하읍소서"라고 간구할 때 우리는 사단의 악으로 부터 즉 "악한 자"라고 불리우는 사단으로부터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 사단은 악한 자인가? 그는 최초의 악의 발행자이고 하나님께 최초의 반역을 시도한 자이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저는 처음부터 살인 한 자요/요 8 : 44). 사단의 성향은 오직 악으로만 향했다(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엡 6 : 12) 사단은 막강한 적대자이며, 그는 초능력으로 무장하고 그의 강한 힘을 악한데 사용한다. 사단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단의 공격을 대적할 힘을 구하도록 간구하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4)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이 간구에서 세상의 악(the evil of the world)으로부터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이 악한 세대(世代)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 1 :4).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약 1 : 27) 은혜로운 삶은 악에서 구원 받는 기도를 이루는 것이다. 세상에는 삼위일체의 올가미가 있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세상에서 부의 호화로움, 뛰어난 명예, 쾌락의 유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세상의 악으로 향하는 욕망을 억제 시킬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5)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이 간구에서 현세적인 악(Temporal Evil)으로 부터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현세적인 악(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음을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악으로부터 구원 받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현세적인 악으로 부터 구원받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보이시는 한에서, 그리고 그의 영광과 일치 할 수 있는 한에서만 기도해야 한다.


(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이 간구에서 악한 모든 일로 부터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악한 일에 너무 많이 부딪친다. 육체의 열매를 맺는 세상의 소욕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 과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황함과...갈 5:19∼21)을 두고 "이런 일(악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 : 21)"라고 했음을 주목 해야 한다. 우리의 간구는 "이런 일"(악한 일)에 빠지지 않고 연약해서 빠졌을 지라도 즉각 구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7)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 할 때 우리는 이 간구에서 "악한 일을 하는 자"로 부터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악한 일을 하는 자(者)란 사단이 시키는 대로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일 경우도 악한 자(者)이다. 가령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는 악한자였다. 생명의 존엄성과 귀중성을 파괴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신성한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은 문화인, 기업인, 경제인, 실업인, 과학자, 정치인 할 것 없이 악한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서 건지옵소서"(살후 3:2)의 바울의 기원을 본문의 주기도문에서 간구해야 한다.



3.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간구에 대한 우리의 실행, 책임, 정신에 대한 태도


1)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우리의 성품이 형성되고 행위가 조절되고 바로 잡아질 수 있어야 한다.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사단(악한자)의 어떤 시험(유혹)이 있을 때에라도즉각적으로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주장 하지 않을 때에는 내 육신의 정욕과 죄악이 나를 유혹하고 지배해 버린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악과 대항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실행, 책임, 정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훈 하시고 있다(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시 66 : 18).

악의 모양에 대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 : 2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 하라”(벧전 5 : 8∼9),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 하느니라” (골 3 : 5∼6),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 를 찔렀도다”(딤전 6 : 1), 악한 자 마귀에 대하여 “모든 것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 6 : 16)등등 많은 말씀으로 교훈 하시고 있다. 악한 자 (사단)의 시험(유혹)에 승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말씀에 전폭적으로 모든 삶을 의지해야 한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 하나이다(시 119 : 97), “그 말씀을 깊이 마음에 두며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 : 11)라는 시편 성도의 고백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에 두는 일이란 말씀을 상고하고 암기 하는 일이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님 자신도 악(악한 자, 사단)으로부터 그 시험(유혹)을 친히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사단(악)이 유혹(시험)할 때 “성경을 보고나서 말씀하시기를”이 아니라 “기록 되었으되...”하시면서 자기 마음속에 기억 되어 있는 말씀으로 사단을 대적하시었다. 성경에도 주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라”(잠 3 : 3)라고 했다.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꽉 차 있어서 언제든지(Whenever) 어떤 장소에서든지(wherever) 사용해야 한다. 이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지도록 항상 읽어야 한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계 1 :3...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진정한 성도의 복은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악으로부터 승리하고, 시험(유혹)으로 구원 받는 이중적인 복을 누리는 것 이다.


2) 우리의 연약성(Total unability)을 내 모습 이대로 고백하고 시인 할 수 있어야 한다.

(1) 때로 우리는 악이 유혹(시험)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험(Test)하시는 것인지 사단(악)이 시험하는 것인지 그 정체 조차 분별 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하와가 맨 처음에 그랬고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단의 시험은 간교하기 때문에 그것이 시험인지 아닌지 미처 모른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약점이고, 무능함이고, 문제점이다.


(2) 때로 우리는 사단이 주는 시험(Temptation)인 줄 알면서도 끌려 들어가는, 그래서 시험인 줄 알면서도 돌아서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야고보 사도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 (약 1 : 14)라고 기록 했다. 그것이 욕심인줄 알면서도 끌려간다. 욕망이 고개를 들때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 간다. 명예욕, 이성욕, 물욕인 줄 알면서도 욕망의 뿌리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뿌리를 내리고 악의 열매를 맺기까지 나아간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시험(유혹)이 될 만한 것과는 가까이 하지 말고 그 시험 거리를 청해서는 안된다. 가령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가면서 "이 뜨거운 불이 나를 뜨겁게 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와 똑같은 격이 되고 만다. 우리는 항상 연약하다는 연약성을 기억해야 한다.


3) 성령(Holy Spirit)의 소욕(所愁)을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 : 17)라고 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갈 5 : 16)을 강조 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은 악한 자(사단)의 시험 (유혹)에 끌리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은, 악한 자(사단)의 시험(유혹)에 승리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삼손, 사울은 자신을 드렸을 때(성령이 충만 함으로)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의 충만이 그들을 떠날 때 악한 자들 의 손에 넘기우고, 악령에 이끌리어 죽음의 길을 선택 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함께 그를 도우셨고 약속 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셨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고"(행 1 : 8)라고 말씀 하셨고,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능력을 얻은 사도들과 제자들은 악한자(사단, 귀신)를 내어쫓고, 악한자에게 괴롭힘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해 주었다.

성령은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고,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영이다. 그러나 악한 자〈성경에는 "악한 영"(엡 6 :12) 이라 표현는 더러운 영이고, 거짓 영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악" 하게 살도록 유혹하고, 유혹에 빠뜨린다. 스스로 더럽혀서는 안되는 이유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한 후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이다. ("너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 : 16). 그래서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성령으로 살면서 성령으로 행할 때(갈 5 : 24∼25),〈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과의 싸움을 싸운다고 하면 우리의 약한 육신을 모두 벗어버리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라고 했다.


4) 악(사단)으로 부터의 시험(유혹)에 승리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상급을 바라보아야 한다.

야고보 1 : 12 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라고 우리 개인 각자에게 하나님의 상급으로 약속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향해서 약속하신 상급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 : 7)고 하였다. 에덴동산(창 2 : 9, 3 : 22)에서 잃어버린 생명을 하나님의 신천 신지에서 회복시키시어 그 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먹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이는 곧 영생을 의미 하며 죄악에서 회개 하고, 악에서 “이기고” 악에서 구원 받은 자가 얻을 영광이고 은혜의 상급인 것 이다.


(2)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 하리라” (계 2 : 11)라고 하셨다.

첫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고, 둘째는 영의 죽음이다. 즉 죽은 후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계 20 : 6, 21 : 8). 영생으로 부활하는 것은 첫째 부활이다. 주기도문 본문과 관련해서 볼 때 악에서 이기는 자는 영원히 죽는 심판의 자리에서 구해 주신다.


(3)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 한 것이 있나니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 : 17)라고 하셨다.

이것은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요 6 : 35)을 통하여 신령한 만나를 받은 것을 뜻한다. 흰 돌은 옛날 그리스의 경기장에서 우승자의 이름을 새겨 주었던 것을 참작해 볼 때, 하늘나라에서 세상의 악한 유혹에서 승리한 신앙의 승리자에게 주는 상급으로 볼 수 있다.


(4)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계 2 : 26-27) 라고 하셨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은 정복과 승리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만국을 정복하시는 동시에 질 그릇을 깨뜨리는 육정(세상의 악한 것)에 사로잡힌 세상적인 마음 (악한 마음〉도 깨뜨리신다. 우리는 세상의 악의 세력을 깨뜨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오늘도 유혹에서 건짐 받도록 이 간구를 드리므로 승리 할 수 있다.


(5)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횐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 하리라”(계 3 : 5)라고 하셨다. 여기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옷 이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은 옷이다. 신약에서 흰옷은 언제나 정결을 표시하며 승리를 표시한다.

죄악과 시험(유혹)에서 구원받고 승리한 성도들의 받을 영광은, 의로운 자를 위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고, 악한 자를 위해 살아간 악인은 멸망(심판)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 될 것이다.


(6)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 하리라”(계 3 :12) 고 하셨다.

기둥이란 건물의 중요성과 부동성을 유지 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가 하늘에서 차지할 위치는 중요하고 영원 부동하다. 이러한 기둥에 이름을 새기는 것 처럼 승리자의 이마(계 1 : 3)에는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기록 한다. 그래서 승리자는 그 이름에 속한 자가 된다.


(7)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 : 21)”이다. 이것은 일곱 교회에 주신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의 절정이다. 메시야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 하셨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보좌에 승리자도 같이 앉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광에 참여 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악(사단)과 시험(유혹)으로 부터 이기었을 때 주시는 상급의 절정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결 론


이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의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의 마지막 간구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다. 주기도문 자체의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기원(Thou-petitions)이지만, 후반부의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은 전적으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상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에 관한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은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필요도 충족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필요를 충족 받기 위해 마지막 청원에서 하나님은 이중적인 안전 장치가 될 수 있는 악에서 구해 주시고, 시험에서도 구해 주시는 구원을 통해 승리를 약속하시며 기도하라고 하신다. 사도들과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오늘날까지 당한 모든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원수인 악(사단)의 역사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청원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현재 미래 포함)확신과 믿음의 청원이어야 한다.

디다케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루에 3번씩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숱한 악(사단)의 시험(유혹)들을 회피 하거나 도망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처럼 사단의 시험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여섯 번째 청원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만 일사각오로 따르겠다는 고백과 헌신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없이 살 수는 없다. 시험과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전하고 경건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시험이나 유혹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승리하고 극복하기만 하면 우리 삶에 큰 유익을 준다. 그로 인하여 사람은 겸손하여 지고 심령이 깨끗히 정화 되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을 시작 하자 마자 어려운 시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전체를 통하여 거의 끊임 없이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 시험이 가벼운 경우도 있고 잠깐 동안의 고통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시험(Test)하실 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약속과 공의와 그 지혜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형편과 능력을 저울질 하여 그가 택하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시험(Test)을 주신다. 또한 감당할 시험을 주시므로 (고전 10 : 13) 우리를 도와 주시 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떤 시험이나 역경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벧전 5:6)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감각이 둔하여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자기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 하면서 여섯째 간구를 드려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높여 주신다. 때로는 영적 생활의 겸손과 순수성을 시험 받을 지라도 그 시험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도움만 믿고 의지할 때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주여 나로 나 자신에게서 구원해 주소서" 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도움을 구하는 기도이다. 본인의 논문에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드릴 때 여섯째 간구를 어떤 태도와 내용으로 하는가에 대해 "시험과 악한 것의 유혹에서 이기도록 기도한다" 라고 80%가 긍정적(Yes)인 답변을 했다.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에 대한 질문 중에 가장 높은 수치로 긍정적인 웅담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론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시험(Test)과 악(사단)의 시험(Temptation)은 일평생 부딪치는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일 보호(Daily Presevation)의 은혜를 구하는 심정에서 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이전에 이미 대부분 간구 하고,실천하고 행동에 옮기는 노력의 자리에 있어야겠다.

여기서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이 마지막 청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의지에 따라 이 기원을 드려야 한다는 그의 고백을 소개 하면서 본문의 청원을 마치려 한다. "당신은 참으로 기도하며 시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선한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시험주시기를 기뻐하시면 순종하라. 아니, 하나님이 시험을 계속하시면 현재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주지 않으시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lie at His feet), 하나님은 은혜의 주님 이시니(for God is Lord oh His own grace).












여 섯 째 간 구


1. 여섯째 간구와 다섯째 간구 사이를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여섯째 청원이 (마태복음의 본문) "다만"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해서 서로 연결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여섯째 청원이 약 1:13 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4.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Test)과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시험(Temptation)은 어떤 점이 다른가?


5. 예수님께서 “시험”이란 말을 사용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6. “시험”이라는 의미는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적용하고 있는가?


7.「시험」(유혹, Temptation)은 어디서(Where) 오며 어떻게 (How) 오는가?


8.「시험」이란 어휘가 유혹(Temptation)한다는 뜻을 포함하는 신약 성경의 기록들은 어떠한가?


9. 인간 내부의 약점과 강점 어느 곳에도 찾아오는 시험(유혹)의 경우는 어떠한가?


10.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의 의미들은 무엇인가?


11.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라는 간구에 대한 우리의 실행, 책임, 정신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


12. 악(사단)으로 부터 시험(유혹)에 승리 하여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상급은 무엇인가?







기도에 관한 명상


“당신은 참으로 기도하며 시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선한 수단을 모두 사용 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시험 주시기를 기뻐하시면 순종하라. 아니 하나님이 시험을 계속하시면 현재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주지 않으시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 하나님은 으혜의 주님이시니”

(토마스 맨튼. Thomas Manton)


“우리는 모든 종류와 모든 정도와 모든 경우의 악으로부터 어두움의 세력의 악의와 힘과 교활함으로 부터; 이 악한 세상과 그 모든 유혹, 함정, 분노, 기만으로 부터; 그것이 억제되고 정복되고, 종국에는 근절되도록 우리 마음의 악으로 부터; 고통의 악으로 부터; 구원 받기를 위해 기도 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토마스 스콧트, Thomas Scott)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중보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온 인류를 위해 중보 기도 하고 계시며 성령님께서도 우리들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간구하고 계십니다. 중보 기도란 나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성령의 권능을,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대로 기도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중보 기도 함으로써 우리는 삼위이체의 하나님과 더불어 새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는 우리가 때때로 시간을 내어 기도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중보 기도자가 되어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막으며, 바울과 같이 온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바치는 그것입니다.

(안디옥 세계 선교회 대표 / 오대원)


Ⅶ. 송 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괄호 속에 든 기도는 한글개역성경 마태복음(마6 :13)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송영(The Doxology)혹은 영광송이라고도 한다. 주기도문에서 송영은 그 기도의 탁월성과 완결성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주기도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칼빈'은 이 송영의 부분을 "생략 하지 않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을 구할 뿐 아니라, 마땅히 감사와 찬양을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담아야 한다. 때문에 주기도문에 첨가된 송영은 하나님과 교통케 하는 영혼의 합당한 언어들이다.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귀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하고 있는가? 주기도문의 마지막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에 하나님만 믿고 또 기도할 때에 그를 찬송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 라고 가르친 것이다.

또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뜻의 증거와 들으실 줄 아는 표로 아멘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아스(Jeremias)가 "기도가 간구로 끝나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하여 주기도문에 송영(영광송)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처럼 마지막 송영을 통하여 기도로써 완벽하게 보여주는 점들과 그 속에 있는 각 단어들과 어휘 전체를 마음으로 깊이 묵상 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송영이 괄호와 함께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 안에 포함 시켜져있고 그 대신 성경 하단에 "고대 사본에 이 괄호안의 구절이 없음"이라는 주(註)를 달아 두고 있다. 누가의 본문에는 그 기록마저도 생략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본상의 증거들을 본문 비평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공통된 학자들의 견해는 사본상의 증거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사본의 질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지역의 분포에 있어서나 송영을 가진 본문보다 훨씬 타당하게 후대에 첨가된 간구로 강력하게 지지를 얻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메쯔거(Metzger)의 견해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마태의 본래 본문으로, 그리고 송영은 뒤에 첨가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성경적 본문에 속한다는 주장을 제외해 버리려는 태도를 가졌던 역사도 있었다.

암부로시우스(Ambrosius)는 그의 저서 중 성례전에 관하여(De Sacaramentis)에서 송영(영광송)이 없는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고 그의 같은 책에서는 그 주기도문을 각 청원에 따라서만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뒷 받침 해서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 되어온 송영을 제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 할 수 없다고 본다.

하르너(P. B Harner, Understanding The Lord's Prayer)의 말을 빌리면 초기의 본문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주기도문을 주셨을 때 송영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주기도문을 자유롭게 형성된 어떤 기원으로 결론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기도문이〈어떤 송영〉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이 유대 종교의 원리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이〈시험〉이나〈악〉이란 말로써 끝내어 지기를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제자들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찬양으로 주기도문을 끝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송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구약과 유대 종교에 있는 그들의 부유한 의식적 유 산을 활용 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예레미아스(Jeremias) 역시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이 주기도문을 사용하면서 당대 유대 관습을 따라 어떤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사용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동의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디다케(Didache)에도 보면 오늘날 주기도문의 송영과 같은 유형이 있으나 거기서는 "나라"가 빠지고 "아멘"이 없다. 그러나 이런 점은 주기도문 송영의 문구에 있어서는 같지 않으나 그 기능상으로는 조금도 흐려짐이 없다.

여기서 송영을 제외시키는 데 찬성하는 자들의 견해는 역사적 데이타의 근거가 없는 추측이나 비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예수님께서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유산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유대적인 관습, 성경기자들의 관습처럼, 우리도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드리는 자세가 옳다고 인정한다.




2.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성경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성경에 전반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써 정리되어 진다.


1) 거룩하고 기쁜 찬양으로서


2) 모든 기원을 실행하기를 탄원하고 논증하는 것으로서


3)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확인과 천명으로서 간구 되어 진다.

송영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의 참된 진수를 마무리 할 수 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구약의 시편의 기도에도 끊임없는 기도와 찬양이 있다.


(1) 구약 성경 가운데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의 유형은 시편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사용 되어 지고 있다.

① 역대상 29 :11, "여호와여, 광대하심과〈권능〉과〈영광〉과 이김과 위험이 다 주의 것으로 소이다."

② 시편 146 : 10,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통치〉하시리로다.〈아멘〉"

③ 시편 72 : 19, "…온 땅에 그〈영광〉이 충만 할지어다〈아멘〉〈아 멘〉."


(2) 신약 성경 가운데도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의 유형은 바울 사도의 권위 있는 교훈과 다른 성경 기자들에 의하여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 속에 담겨 있다.

① 딤후 4 : 18, "그에게〈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② 계 5 : 12,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영광〉과〈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았던 탁월한 성도들의 기도는 모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 (시 22 : 3)께 드리는 찬미와 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주기도문의 송영은 성경에 나타난 그 유형들과 비교할 때 기도하는자의 모범적인 간구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모든 간구와 찬양의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이심을 알게 한다.


즉 이 송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했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우주의 왕 통치자이심을 찬양 하므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모범적인 기도인 주기도문은 간구하는 자들이 간구 할 때 감사와 찬양이 있는 기도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찬양으로 신실하고 솔직한 성도들의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릴 때처럼, 송영은 그 빛의 퇴색함이 없이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날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스런 예배 가운데 함께 할 것이다.


필자는 교회예배에서 주기도문과 함께 암송도 하지만, 기도의 진실함과 정성스러움을 드리기 위해 주기도문 찬양을 설교 순서 바로 전에 회중과 함께 일어서서 찬양 한다. 그때에 열리는 기도의 문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충만 하시기를 기대하며, 각 간구 속에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붙잡는다.




3. 주기도문의 송영에서 첫 머리에「대개」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대개"라는 헬라어는 "호티"(ὃτι)인데 영어 성경 번역에는 네 가지 유형으로 기록 되어 있다.


1) 고대 권위 있는 사본들이 그 기록을 생략하고 있는 것을 따른다.


2) 송영을 주기도문 본문 마지막에 기록하되 괄호 안에 두고 있다. (이것은 본래 권위 있는 사본에서 생략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3) 송영을 주기도문 본문에 기록하지 않고 별도로 난하주에 기록 한다.


4) 송영을 괄호 없이 주기도문 본문에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대개"라는 우리말 성경 번역에 영향을 끼친 중국어 성경 경우에서「아마」,「대개」,「대략」,「혹은」으로 간주 할 수 있다. 혹은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 때문이다."의 뜻으로 영어의 "because"에 해당 된다. 그런데 대부분 영어 성경에 "because"을 쓰기 보다는「For」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For」는 헬라어인 가르(γαρ)가 있기 때문에「For」로 된 영어 성경처럼 우리 글 성경에 번역해야 한다면 "이는…"으로 번역 하는 것이 타당 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단어 번역의 중요성보다 주기도문 전체가 송영과 연관성을 갖게 하는 점에서「대개」라는 말이「때문에」「왜냐하면」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도 피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기도문 전체의 사상이 되는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대개」로 시작하여 번역될 수 있는 본문의 송영의 하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이 송영의「대개」는 주기도문의 모든 기원을 간구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릴때 간구의 이유로 서두에 첨가 시킬 수도 있지만 맨 마지막에서 모든 간구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함을 명확하게 해준다. 여기서 종합적으로 세 가지 번역이 나올 수 있다.「대개」,「이는」,「때문에」등이다.

정확한 번역과 사용도 권하지만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의 특징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셨고 받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감사 하는데 근본적인 정신과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본다.



4. 주기도문의 본문과 함께 송영의 의미가 가지는 상호 연관성은 무엇인가?


주기도문의 송영은 주기도문 전체 구성에서 그 균형을 유지 시켜 준다.

메튜 헨리(Matthew Henny)는 "첫번 조목의 세 가지 간구와 주기도문의 하나님께 대한 간구(Thou-Petitions)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머릿말에 이어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는 송영에서〈영광〉, "나라에 임하옵시며"이고 송영에서〈나라〉, 뜻이 이루어지 이다"는 송영에서〈권세〉라고 하였다. 세 간구는 우리 자신의 특별한 임무에 대하여 표현하듯이 주기도문 본문과 송영은 서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주기도문 전반부의 세 간구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 나라, 뜻은 송영에서의 나라, 권세, 영광과 서로 자연스러운 조화를 유지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도문 강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간구(Thou-Petitins)와 우리에 대한 청원(We-Petitions)에 대해서 다투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기도문 본문과 송영과의 상호 관련을 통해 담겨진 의미만을 다루고자 한다.


첫째 : 나라(Kingdom)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주기도문의 간구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송영에서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속해 있다는 찬양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간구 할 때 찬양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이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의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 간구하며 찬양 해야 한다. 찬양 하며 간구할 때 웅담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1) 과거에 있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눅 13 : 28)

2) 현재에 있는 것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 :21)


3) 장래에 있는 것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계 21 :1)등으로 말씀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로써 왕이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온전히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나라의 성취는 아직도 미래에 속해 있으므로 송영할 때마다 "나라가 당신의 것이 옵니다"라는 간구를 찬양으로 드릴 수 있게 된다.〈나라〉라는 어휘의 헬라어 사전은〈주권〉,〈다스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상에서도 그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다스릴 때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 나라 천국의 만족을 얻고, 그 기쁨을 소유하며, 그를 찬양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우리가 이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드릴 때 그 간구는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우리의 삶 속에, 가장 속에, 사회 속에, 그리고 교회 속에 계속 된다면 우리가 드리는 송영은 감사와 찬양이 담긴 모범적인 기도가 되리라 본다.


둘째 : 권세(Authority)가 당신에게 있사옵나이다.

주기도문의 셋째 청원에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라는 간구는 송영에서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는 찬양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영광중에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때문에 자기가 원하시는 것은 하늘에서 이루시고 땅에서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권위와 권리를 가지시고, 이 권리와 권위로써 자신의 기뻐하신 뜻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시고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와 은혜에 있어서 최고 주권자이시다. "권세"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고 하늘과 땅에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권세는 은혜와 사랑을 목적으로 그의 공의로 그의 뜻을 성취하시는 위대하고 참된 권세이다. 그의 권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왕 바로의 거대한 세력을 꺽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 동안, 반석에서 생수와, 하늘에서 내리시는 만나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구원 하셨던 권세이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나니"(요 10 : 18), 하늘과 세상의 모든 권세를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는 분 이라고 설명 하셨다. 그 권세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도 내어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자신이 부활의 권세에 참여 하시고 승천 하시고, 다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와 심판의 왕으로, 그 권세를 가지시고 오실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와 함께 사탄으로 부터 오는 권세를 경계 해야 한다. 마 7:22에 보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 : 23)고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사단으로부터 오는 권세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Miracle), 능력(Power)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현혹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메스콤을 이용해서 성령의 능력(Power)이라고 청중들과 시청자들을 매도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사단의 권세가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는 때인 것을 알게 된다.

사단을 숭배하는 사단경배자 들은 사단의 힘을 이용한다. 그들은 개신교(Protestant Church) 목사들을 물질적 (돈), 육체적(이성)으로 타락 시키며 신자들을 교회에서 멀어 지도록 하기 위해 사단에게 금식 기도까지 한다고 한다(물론 이런 금식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 하시지 않는다.)

세상과 악과 사단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보다는 결코 강하지 못함을 아는 신자들은 참으로 진실 된 권세를 붙들고 의지해야 한다.

세상의 권세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큰 권세, 작은 권세, 선한 권세, 악한 권세, 유익을 끼쳐 주는 권세, 해를 끼쳐 주는 권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권세는 내 권세"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도적질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어두움의 권세"(눅 22 : 53) 아래 놓인다. 이런 자들이 권세를 잡을 때 그 권세로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권세를 남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므로 인류의 반역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을 고백 했고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롬 13 : 1), 그러므로 그 권세를 잘못 사용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취 하리라"(롬 13 : 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 주어진 권세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라"(대상 29 : 11)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영원한 참 권세가 있다. 죄를 사하는〈권세〉가 그에게 있다(마 9 : 6). 귀신을 내어 쫓는〈권세〉도 있으시고 우리에게도 그 권세를 주신다(막 3:15). 그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하나님의〈권세〉가 있으시다(마 28 : 18, 눅 4 : 32) 그는 죽음을 다스리시고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권세〉를 가지셨다(요 11장, 고전 15장). 병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고 우리에게도 주신다(눅 9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 1:12). 만민을 다스릴 권세(Authority)의 근본이시다. 그 모든 권세는 성부 하나님과 원초적으로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구원에 반대되는 악한 사탄의 힘을 정복 하신다. 권세(Authority)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엑소시아(εχουσια)라는 말이고 영어에서는 EXOSIST 즉 마귀 추방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모든 사탄의 힘을 추방 시키시는 권세를 가지셨다.

이러한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이유는〈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Authority)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 : 18〉모든 족속으로 이 복음에 복종케 함에 있고 우리가 이 권세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지상 대 위임령을 수행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할렐루야! (Praise the Lord!) 여기에 우리가 이 송영에서 "권세가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라고 찬양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간구를 마치면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하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주기도문의 찬양 가운데〈영광이 영원히〉라는 대목을 부를 때마다 그 감동과 감화를 성령님의 은혜로 체험하며 기쁨과 뜨거움으로 이 송영을 드린다.


셋째 : 영광이 당신에게 있사옵나이다.

주기도문의 첫째 청원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간구는 송영에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찬양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 영광은 영원히 높임을 받으시고 영원히 경배를 받으시는 그분께만 돌려 드리는 것이다.


1) 하나님께 관한 영광은 그의 신적 속성과 완전함을 나타내거나 또는 임재의 영광을 나타낸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19 :1〉


2) 영광은 영원한 것이며 성도들에게 예정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1)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벧전 5 : 1)


3)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요 1 :14)


4)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나타났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출 15 :6)


5) 하나님의 영광은 성도의 순교에서 나타난다.

("스데반이…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서신 것을 보고" 행 7:55)


6) 하나님의 교회에도 그의 영광이 임재 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 하시고 그 영광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시 102 : 16)


7)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 : 20)


8) 표적과 이적을 주시므로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요 2 : 11)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운 영광중에 스스로 거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장엄한 목표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항상 간수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이 기도의 응답자라는 영광을 소유 하셨다.

그 분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우리의 송영은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 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 할지어다."(시 72 : 19)하고 노래했다. 인생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인생의 삶의 목적과 이유를 한 마디로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에게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 : 31)고 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낼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이유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에 그에게 있으리로다"(롬 11 : 36)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들의 삶은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해야 된다는 데에 그 촛점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제자의 삶으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 : 8)라고 말씀 하셨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의로운 삶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 돌리며, 살 수 있기를 기대 하면서, "의의 열매 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 : 11)고 하였다. 나무의 목적이 결실이라면 결실 없는 나무가 주인을 기쁘게 할 수 없음과 같이 의의 열매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세상의 영광을 위한 현세의 영광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① 일시적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벧전 1 : 24)

② 현세의 영광은 마귀의 유흑의 원인이 된다.

("마귀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8)

③ 수치로 변하는 것이다.

("저희는 번성 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 4 : 7)

④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려 할 때 부끄러움으로 변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마 6 : 2,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 하는 자라." 빌 3 :19)

⑤ 인간의 영광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 함이로다" 시 49 : 17)

⑥ 인간의 영광은 자랑할 것이 없는 지혜, 부함, 권세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 9 : 23),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육체는 아무도 없으며"(고전 1 : 29), "인간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할 수 없는 것이다"(갈 5 : 26)


지상에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위해 만든 많은 인위적이고 인본주의적 영광이 많다.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개인 에게도 영광이지만 역사에 유익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이름을 인정해 주는 정도의 가치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숙한 것을 가지고도 훈장을 만들고, 기념패를 만들고, 학위를 달아주고, 박수 치고 떠들석 한다. 개인적으로 기쁨과 격려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인위적 이고, 인본적인 영광 일 때 문자 그대로 "녹 쓴 영광"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고 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로 충만 된 삶을 살으셨다(요 1 : 14).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된 삶으로 전생을 드리셨다. 그 분의 삶을 닮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드렸던 인물들을 보라. 그 들은 역사의 주인공들로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은 역사를 그들의 손에 맡기셨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찬양을 담은 헨델(Handel)의 오라토리오 중에「메시야」에 나오는「할렐루야」의 합창을 들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림에 감격하게 된다. 헨델 자신은 이 곡을 작곡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느껴 눈물을 홀리면서 작곡 했다고 한다. 이 곡이 영국 황제(George Ⅱ세)가 참석한 1743년 4월 13일 런던 시에서 연주 되었을 때 왕은 그 감격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영광」앞에 다같이 기립 할 수 있는 삶을 이 주기도문 송영을 통해 드릴 수 있어야겠다. 종교 개혁자들의 신앙은「오직」이란 특색 지은 강령으로 일관 한다.

우리의 구원의 길은「오직 은혜」와「오직 믿음」(Sola Gratia, Sola Fide) 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근거를 위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했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Object of Faith)은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Object of Life)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대 Gloria)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고백 했다.

교회를 건축하는 일터에 석공 세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그 중한 사 탐에게 "왜 일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한 사람은「죽지 못해 일 한다」라고 대답했다. 또 한 사람에게 물었더니「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한다고 하였다」. 셋째 사람에게 물었더니「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라고 대답 했다고 한다.

세번째 사람은 생의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끌어 올려 인생을 산 사람이다. 인류 최대의 목적이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주기도문의 송영 속에서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든지 현주소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그 어떤 것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과 대치될 수 없다. 사생관(死生觀)도 우주관도 그분께의 영광을 위 해 존재해야 한다.

때로는 칠 흙 같은 인생의 암흑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몽땅 던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 (롬 8 : 18) 라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주기도문의 송영에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찬양을 드릴 수 있다.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My Lord), 나의 하나님(My God)으로 영접한 이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Do all to the glory of God)는 문구를 좋아하여 사무실이나 기도실이나 책상 앞에 써 붙여 놓곤 한다.

이 글을 볼 때 마다 다시 한 번씩 나의 자세를 살펴보며 말씀 안에서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려 노력한다. 그러는 동안에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의 두 가지 자세를 배우게 해 주셨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기도의 자세이다.

구약성경에 시편 성도의 간구의 말씀("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 시 86 : 3,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 시편 86 : 6)에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고 열심으로 부르짖고 간구할 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은총의 표징"(시편 86 : 17)을 내게 보여 주시는 것을 체험하며 날마다 그 귀하신 축복 속에 주기도문의 송영을 드리는 것은 서슴 없는 나의 믿음의 고백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찬양의 자세를 배우게 하셨다.

시편 119 : 164의 말씀처럼 하루 일곱번씩 주를 찬양(Seven times a day, I praise you)하려고 노력 하며 실천하고 있다. 나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된다. 온 몸과 정성을 다해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부터 드리는 찬양은 내 기도의 문을 활짝 열게 해 주시는 은총으로 이어지고, 회개와 감사, 간구(교회, 전 세계의 영혼들에 이르기까지)가 계속 되게 한다.


넷째 :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지금까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는 송영의 종목을 다루어 보았는데, 이제 송영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히"드려 진다는 의미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주기도문 강해를 처음 시작 할 때 서론 부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전반부의 모든 본문은 송영에서 "아버지"를 찬양함과 연관 관계를 가지게 한다.


이 어휘에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며, 하나님께의 영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 하고 있고, 기도의 근원과 능력과 시작과 결론과 응답과 해결이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음을 확인 시킨다.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 간구는 얼마나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는 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곁에 계신다는 것과 아버지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는 귀한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피의 공로로 구속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롬 8 : 15,갈 4 : 6)"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허락 하셨음을 찬양해야 한다. 아바 아버지로서 그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나누어 주신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 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 : 13)라고 하셨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운 경험으로 우리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구함을 잘 안다. 그런데 무조건 달라고만 하는 자식은 주면서도 서운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면서 달라고 할 때 서운함이나 마음 아파함이 없이 기쁨으로 준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구하는 것도 필요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음에 기뻐하시도록 구해 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높여 드리며, 존경해 드리며, 기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찬양하는 그의 자녀들로써 간구해야 함 을 송영의 이 어휘에서 만나게 해 준다.


2) 주기도문의 모든 본문은 송영의 마지막 어휘인 "영원히" 라는 찬양과 함께 영광을 가진다.

〈영원히〉란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권세와 영광은 영원하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며 기도의 완전성과, 명확성, 영원성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벵겔(Bengel)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아들의 전수가 그들 신앙의 편력의 종점에 다 달았을 때 하늘에서 순수한 송영이 일어 날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며, 나라는 임하였으며, 뜻이 이루어졌으며, 우리의 죄를 사하셨으며, 시험을 그쳤고, 우리는 악에서 구함을 받았나이다. 나라와 권세와〈영원히〉그의 것이니이다. 그리고 아멘 이라고 뒷받침 해주고 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영광스러운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하나님"(시 90 : 2)이시다. 하나님을 계시 하시고 기도의 총결산이요,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 13 : 8).

〈영원히〉라는 이 어휘는 얼마나 장엄하고, 우주적이고 소망을 주고 있는가!〈영원히〉라는 말은 유태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주 사용 했는데 영원한 미래의 세대를 부인하는 이단에 대항하여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 위에 피조물들의 세계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세속적인 모든 부귀, 영화 등은 쇠퇴하고 사라진 것을 본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화려하고, 장엄하고 우아한 어떤 예술품과 문학작품, 과학과 지식등 모든 것이 결코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사랑도, 우정도 진실되고 영원한 것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영원의 형상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창 1 : 26, 27).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영원하시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어떤 변화도 받지 않고 감소되지도 않으며 끝을 모르는 영원 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계 20 : 1)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그 놀라운 실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의 찬양을 영원토록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모범적인 기도인 주기도문을 바로 이해하며 송영으로 기도를 마무리 할 때 시간의 세계를 넘어선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며 현재의 것들을 미래와 연결하여 영원한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해야 하겠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 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 하시기를 원하노라아멘"(엡 3 :20, 21).




5. 주기도문의 맨 마지막이고 송영의 끝부분에 붙은〈아멘〉이란어휘는?(마 6 : 13)


주기도문의 송영의 괄호 안에 든 간구 마지막에 기록된〈아멘〉이란 어휘는 주기도문의 각 부분과 어귀마다 적용할 수 있다. 즉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계속해서 송영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등이며〈아멘〉은 주기도문 본문의 모든 기도와 상관관계를 가진다.

〈아멘〉은 모든 기도의 소원과 믿음의 결단이다.

〈아멘〉이란 히브리 말에서 "확실하다", "진실하다" 둥으로 쓰이던 어휘가 나중에는 "믿는다", "동의한다"는 뜻으로 발전 하였다. 그 유래는 구약 성경에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로 부터 시작 된 것으로(신명기 27 : 11∼26)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각각 모여 축복과 저주의 축원을 할 때이다.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아멘〉하도록 하였다.


첫째:구약성경에 나타나는〈아멘〉

1)〈아멘〉은 여호와께 대한 답변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현으로 상대방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자신이 공감 하였을 때 사용 하였다.

("예레미야가 말하되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소서"… 렘 28 :6)

2) 〈아멘〉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종교적 용어로서 여호와께 대한 사람의 기도를 개인적으로 공중으로 그 기도에 동의 한다는 의미로, 여호와께 대한 찬미를 화답하여 드릴 때 사용했다.

("모든 백성이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양 하였더라" 대상 16 : 36, 시 72 : 19, 시 89 : 52, 시 106 : 48)


3) 〈아멘〉은 하나님께 대한 법령을 준수 하겠다는 서약과 위반 할 때는 처벌을 받겠다는 맹세로서 사용했다.

("회중이 다 아멘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느 5 : 13), "여인이 아멘 아멘 할찌니라"...(민 5 : 22),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어다 (신 27 : 15).


4)〈아멘〉은 충성과 헌신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둘째 :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아멘〉

1) 하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응답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가 아멘하여" 고후 1 : 20)


2) 기도에 대한 응답

(…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 :16).


3) 기도를 끝 마칠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찌어다 아멘" 롬 15 :33)


4) 송영의 처음과 마지막에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일 을 찌어다. 아멘" 계 7:12).

이처럼 사도들의 서신 대부분이 송영 끝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롬 9 : 5,갈 1 : 5,빌 4 : 20,딤전 1 : 17,벧전 4 : 11. 히 13 : 2).


5) 서신(書信)의 끝 부분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계 22:21).



셋째 : 이처럼 성경 전반에 걸쳐서 기록된 아멘은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 말씀을 시작하면서 부르는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 께서도… 왕상 1 : 36).


2) 혼자서 아멘을 하게 될 때 진실을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 주로 구약 성경에 많이 보인다. 성도들의 고백과 찬양 속에 나타난다.(민 5: 22,신 27 : 15-17. 렘 28 :6)


3) 대중과 함께〈아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감사 할 때 사용했다.


4) 말씀이 끝나면서 후렴처럼〈아멘〉을 붙이는 경우에서는 주로 신약시대 예배시에도 사용 되었다.

이것은 서신 여러 곳에 기록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송영이나 간구 화답으로 사용 되었다. (롬 1 : 25,빌 4 : 20,딤전 1 :17).



넷째 :〈아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1) 〈아멘〉의 기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의 이름 (호칭)이기도 하다.

(계3 :14)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계 22 : 20∼21).


2)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진실"이 되심에 적용하신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다 "내가(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멘을 진실의 뜻으로 사용 하시었다.

요한 복음에는 "아멘"이 "진실로", "진실로" 라는 중복된 말로 25회나 기록된다. 그 처음이 요 1 : 51 에 기록되고 맨 마지막 것은 요 21 : 8 에 있다.

요한은 복음서와 함께 그의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멘을 적용할 특징 몇 가지가 있다. 은혜롭고 확인하는 아멘으로 (요한복음에 50회 기록) 감격과 경배의〈아멘〉으로 (계 1: 6∼7)

영광스러운 예고의〈아멘〉으로 (계 3 :14)

즐거운 기다림의〈아멘〉(계 22 :20) 등이다.


3)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응답으로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시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롬 1 : 25, 갈 1 : 5)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딤후 4:18)


4)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의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 (계3 : 14)으로 사셨다. 참된 증인을 따르는 증인의 삶은〈아멘〉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송영 맨 마지막에〈아멘〉이라는 어휘가 성경에 전반적으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다루어 보았다.

이제 우리는〈아멘〉을 우리의 삶과 신앙에 성경적인 의미를 담고 실천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아멘의 삶에 선두 주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닮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 : 20)고 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아멘의 신앙으로 살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믿는 자는 예〈아멘〉만 있다고 선언한다.「아멘의 신앙」은,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YES) 즉 아멘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고후 1 :20〉, 이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사고와 함께 신앙으로 승화 시키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약속은…"(고후 1 : 20)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시다. 약속을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심을 믿는 자가 아멘의 신앙을 고백 할 수 있다.

③ 하나님께 전 삶의 영역 속에 영광을 돌리며 살아간다.

아멘의 신앙은 신앙의 역경과 고난 속에 소망을 잃지 않고 영광 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사는 자에게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롬 8:18). 바울의 아멘의 신앙은「고난』가운데도 미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멘의 삶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라고 (히 5 : 8) 믿음의 진리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 고난당하는 것을 유익 (시 119 : 71)으로 아는 삶,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 (딤후 2 : 1∼2), 하나님의 뜻대로〈고난을 받는〉자들은 (벧전 4 : 19) 분명히 아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멘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고후 1 : 20).


지금까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시작된 주기도문을 송영의 아멘으로 끝마치게 된다.

「아멘」은 주기도문 본문과 송영을 "진실로 그리합니다",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 할 수 있도록 기도의 확신을 준다.〈아멘〉은 신앙의 참된 고백을 기도 속에 담아 드리는 보증이 된다.〈아멘〉은 예수 그리스도께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와 사도들이 전승해 준 송영의 조화로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변함없이「진실」되게 하도록 열쇠처럼, 고리처럼 연결해 준다.

〈아멘〉은 하나님의 응답의 확실성, 우리의 간구나 소원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느끼고 품고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청원에 대해서 더 큰 확실성을 하나님께 갖도록 한다.

〈아멘〉의 신앙은 모범적인 기도를 드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복사하여 옮겨 사는 자녀들을 통해서 그 빛이 드러난다. 그때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본문과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송영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드러나는 생명력이 새롭게 창조되는 산 역사의 현장들이 될 것이다. 그때 드리는〈아멘〉은 문자 그대로「제롬」이 "초대교회의 공중기도와 찬송가 끝에 백성들의 아멘 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우뢰 소리 같았다"고 했던 것처럼 될 것 이다.

〈아멘〉의 입술의 고백과〈아멘신앙〉의 현주소를 주기도문과 함께 송영을 드리면서 점검해 보자!



결 론


주기도문 송영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런 만왕의 왕으로 찬양 드리며 아멘으로 화답하여 감사드리므로 끝맺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찬양과 감사는 모든 기도의 필수적 요소이어야 함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아더 핑크(A. W. PINK)는

1. 거룩하고 기쁜 찬양의 표현으로서;

2. 모든 기원을 실행하기를 탄원하고 논증하는 것으로;

3.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확인과 천명으로서;

이 기도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도의 진수를 제시 하신다.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구약 시편의 기도에는 "기도와 찬양이 끊임없이 결합되어 있다"고 그 완결성과 탁월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주기도문과 송영의 관계를 통하여 귀한 가르침과 진리가 우리의 삶의 영역에 어떻게 적용되며 교훈 하였는지를 몇 가지로 정리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첫째 : 주기도문의 간구와 송영의 찬양을 감사의 고리로 연결하여 서로 상호결합 되어야 함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둘째 : 송영의 찬양은 주기도문 본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Thou-Petition)를 최고의 경배심을 가지고 예배하도록 함을 제시한다.


셋째 :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찬양 받으시는 주님께 완전히 복종하며, 겸손하므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드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넷째 :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는 주님께 나의 충성의 자리는 진실과 성실의 마당에서 죽도록 충성을 드림이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함을 보여 준다.


다섯째 : 송영의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가 단순한 구함에서 보좌의 영광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축복의 문에 들어가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해 달라고(Bless) 요청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송축(Bless)할 수 있어야 한다.


이어서 송영의 그 위치와 중요성을 확인하면 우리의 모든 간구들은 송영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해 드리며 그분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다고 고백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은 우리 신자가 마땅히 선택해야 할 지점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송영은 찬송이요, 감사의 묶음이고, 기도의 근본 요소는 찬양이요 감사라고 지적했다.

한국 교인들의 기도의식을 연구하는 논문에서 기도 중에 찬송을 포함해서 하는 것에 86.4%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왜 자신이 기도 중에 찬송을 포함시켜서 하느냐는 질문에 1) 간절함을 위해(43%), 2) 성경에 기록된 방법이기 때문에(9.6%), 3) 더 잘 응답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6.7%), 4) 상대방이 그렇게 하니까 (0.3%), 5) 영적 지도자가 인도하기 때문에(9.3%), 6) 심리적인 이유 때문(15.4%) 등의 응답이 나왔다.

이상의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교인들의 기도 의식은 기도 중에 대부분 찬송을 겸하는 은혜스럽고, 감동적이고 영적인면을 강조 (간절함을 위해)함에 나타났지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방법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10명 중에 1명 꼴로 나타났다. 이 부분에 우리는 기도가 찬양으로 이어지고 찬양이 기도로 연결되는 성경적인 기도 훈련의 부분이 성숙되어 있지 않다고 볼 때, 찬송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기도 하다. 또한 기도 끝에 첨가되는 아멘(Amen)이란 어휘는 기도 끝에서 첨가될 때 한국 교인들의 기도와 신자의 삶의 모습이 진실로 그러합니다.(77.5%), 유대인의 방식(0.7%), 의미도 모르고(1.8%), 기도의 종결 어미(10%)로 각각 적용되고 있다. 10명 중에 7명이〈아멘〉으로 기도의 화답을 드리는 것을 볼 때 그 의미 그대로 우리들의 모든 기도가 진실로, 곧 그대로 이루어지며 믿어지나이다. 내 생애 충성과 헌신을 드립니다는 고백이 되어 지길 바란다. 그리고 송영은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감사의 고백인 동시에 나아가서는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재림),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영원한 나라에서 이 아멘이 확인 될 것을 믿는 우리의 참된 신앙의 고백이 되어 지기를 바란다. 대개 나라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울러서 우리가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 할 때마다 확실하고 웅담을 받는 삶을 기대한다.










송 영


1.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2.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성경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는가?


3. 주기도문의 송영에서 첫 머리는「대개」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4. 송영에서「나라」(Kingdom)는 본문의 주기도와 어떻게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5. 송영에서「권세」(Authority)는 본문의 주기도와 어떻게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6. 송영에서「영광」(Glory)은 본문의 주기도와 어떻게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7. 송영에서「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하는 부분은 본문의 주기도와 어떻게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8. 송영에서「아멘」은 성경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으며 본문의 주기도문과 어떻게 관련 지을 수 있는가?


















"개혁주의 기도 신학을 통한 바른 기도 신학에 대하여"


「기도의 신학」이란 저서의 제목은 총신대학 학장으로 계셨던 김희보 목사님의 조언을 심사숙고 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기도의 신학」이란 저서를 출판 할 때 어떤 분들이 "기도가 무슨 신학이냐 기도는 무릎 끓고 하면 되는 것이지."라는 말을 할 때마다 무척 힘들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기도"하는 제목만 붙어 있으면 책, 논문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것을 정독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출판된 저서 중에 기도신학이란제목의 저서는 영어 서적 한 두권 정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에 관련해서 저술한 책 목록에 들어가 보면 어렵지 않게「000의 기도 신학」이라는 책들을 발견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 신학이란 제목에 관심이 많아서 그 저서들을 구입하여 읽어 보면서 각 저자들의 기도 신학에 대한 관점을 또 새롭게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어느 분의 글에 본인의 저서를 읽고서 "기도에도 신학적인 관점이 있구나."라는 글을 쓴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앞으로 훌륭하신 목회자, 신학자들께서 기도 신학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저술을 많이 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오늘의 지상 교회들에게 주시는 "기도 신학"이 자리 잡히고 뿌리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또한 본인의 저서가 단순한 주기도문을 해설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책을 읽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본 저서가 영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기를 원하는 분들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일에도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지금까지 본서를 읽으신 분들 중에는 몇 번씩 읽기도 하고, 금식기도 때마다 읽고, 청년 대학부 교재, 주일학교 교재, 구역예배 교재,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들어 왔다. 본인의 바람은 "기도에도 신학적인 관점이 있다." 라는 것을 한국 교회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기도 신학에 대한 입장을 언급하면서 본인의 C.C.C. 국제본부 사역을 통하여 다소나마 실천적인 기도 신학에 대하여 집을 계속 지으려고 한다.


「기도의 신학」이란 저서를 처음으로 출판했을 때는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과 기도 현상 연구의 결과는 저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은 지금까지 기회 있는 대로 신학생들, 목희자, 교회의 특별 집회 등을 인도하면서 기도의 내용 및 현상 연구에 대한 부분을 가르쳤고,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신자와 교회가 되도록 도전을 주려고 노력했다.


"기도 신학"이란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한국 교회가 기도는 많이 하지만 바른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는 점을 많이 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무분별하고 불건전한 신비주의 운동 및 이단들의 발생,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 물질 및 물량주의 성장, 영적인 타락의 현상들이 많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또한 한국 교회가 외식적인 기도, 형식적인 기도만 한다거나, 기도를 무시하고 등한히 하면 자유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이다.

기도를 안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해야 한다면 바른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러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 현상과 내용에 대하여 설문지를 통해서도 정리를 해보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기도의 신학」에서는 기도 현상과 내용에 대한 설문에서 정리된 것은 다루지 않았고, 기도 훈련의 내용과 실제적으로 다룰 수 있는 주기도문을 강해 형태로 저술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기도 현상과 내용을 연구한 것은 목회자들의 유익과 한국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실천적인 면에서 기도 신학이 정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연구 자료에 개혁주의 신학과 바른 기도의 삶을 계속 추가 정리하려고 한다. 목회자는 섬기는 교회 교인들의 기도 형태나 내용을 임상적인 결과에 의하여 검토하고 바로 지도할 필요가 있다.

본인은 한국 교회가 교단별로 바른 기도 현상과 내용을 종합 검토하여 기도 자세와 내용에 올바른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목적을 두고 계속 연구하려고 한다. 개혁주의 기도 신학에서 본인의 기도 신학과의 접촉점을 찾고 이론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 이론적인 면

개혁주의 기도의 그 중요성과 필요성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칼빈은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기도를 “비밀(Secret)스러운” 어떤 것으로 규정했다. 칼빈은 기도란 “원칙적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의 무수한 염려들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고요함을 요구한다.”라고 말했다. 개인 기도의 필요성은 개혁주의 저자 메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해서도 강조되고 있다. 헌신적인 실천에 대한 영향력 잇는 그의 고전 “기도의 방법(A Method of Prayer)에서 메튜 헨리는 기도의 세 가지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 공적기도, 가정기도, 그리고 개인기도들은 모두 하나에 속하며 각각은 다른 것을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1640년대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부터 아주 최근까지, 웨스트민스터 예배 지침(the Westminster Director for the Worship of God)은 은밀한 예배 또는 개인예배의 네 영역을 말하고 있다. 즉 기도, 성경 봉독, 거룩한 묵상 그리고 진지한 자기 점검이 그것이다. 예배 지침의 가장 최근판 에서는 이것들이 확대되어 성경 봉독, 기도, 고요히 기다림, 말씀에 대한 묵상, 자기 헌신, 섬김에 대한 서약 등을 포함하고 있다.

칼빈은 "혼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를 등한시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빈번하게 공중기도에 참석한다 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 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이나 칼빈은 영적인 삶께서 개인기토의 중요성과 바른 기도생활을 통한 경건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영혼의 경건 훈련들을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삶에 접목시키려 했다. 칼빈은 복음은 "우리에게 그 분을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비록 멀리서나마 그 분의 지취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금식은 개혁주의 기도에서 탐심과 방종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경향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경건 훈련을 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칼빈은 금식에 대하며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칼빈은 "경건한 사람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깝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금식을 개인기도와 연결 시켰다. "금식은 은밀한 기도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구주께서 당신을 따른 사람들에게 권하신 의무이다. 나는 은밀한 금식이 기도처럼 일정한 방법으로 견실한 과정을 거쳐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 있어 금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그것도 지주 실천해야 하는 의무로 보인다. 금식을 필요로 하는 영적, 육적 상황이 많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나 친구들을 위해 특별히 바라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로 금식은 등한시되어 왔으며, 모든 진정한 경건의 회복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에서 검소함의 한 상징으로 주의 깊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 개혁 주의자들은 금식과 기도를 통한 개혁주의 기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개혁주의 기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리차드 박스터는 주장한다. "기도하라! 연구하라! 의논하라! 그리고 실천하라!(Pray, study, confer, and practice)"라고 했고 이들 각각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표시이며 다같이 우리를 균형 있는 상태로 유지해 준다고 강조하고 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의 기도를 다루면서 히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기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그 해답으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주요 부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기도로 당신께 열심히 구하는 자와 이러한 선물들에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당신의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한다. 칼빈은 기도가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에 관한 장이 제일 길다. 기도에 관한 장으로부터 개혁 주의 전통에서 기도가 갖게 되는 의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해 주었다. 이러한 이유들" 은 개혁주의 기도 신학(Reformed theology of prayer)을 형성하고 있다. 본인이 기도의 신학을 저술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째 : 항상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에 언제나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 하나님께서 아실 경우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사모하도록 하기 위함 이다. 칼빈은 이처럼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들을 말해 주었다. 이것들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칼빈의 기도 신학은 하나님 중심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변화 시켜 우리의 요구를 채우게 할 것인가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우리의 문제들을 지적해 보자. 과학시대 물질주의 문화의 시민들에게 기도는 특히 더 힘들다. 기도가 무의미하게도 여겨지기도 하고, 책임 회피를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리차드 박스터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잊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바쁜 세계에서 기도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우리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과 당신의 영혼 사이의 부끄러움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 잦은 기도가 필수적이다.”라고 말한다.

20세기 기도의 주된 장애물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자족성을 증명 하려 하게 만든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회복하는 것과 우리가 온전히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회복하는 것, 이 둘 모두가 우리의 개혁주의 유산에서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리차드 박스터는 기도에서 생명력 있고 의미 있는 기도 양식을 회복하고자 "기도에서의 균형 회복"(the recovery of balance in prayer)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기도에는 네 가지 필요한 균형들이 있다고 강조한다.


1) 기도는 협력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우리는 협력기도 (cooperate praying)를 통해서 개인 기도를 살찌우는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2) 기도는 자발적인 동시에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3) 기도는 음과 가슴의 일이다. 기도는 지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도는 웃음과 눈물 모두를 포함한다.

4) 우리는 말하는 자인 동시에 듣는 자로 기도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규칙적인 기도를 위해 하루 중 기장 좋은 시간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의 깊은 충고를 하고 있다.



둘째 : 실제적인 면

실제적인 면에서의 기도 신학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주기도문은 성경에서 기도의 축소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오늘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롬 8:34) 땅에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삶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실천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일을 위해 사역하셨고, 성령 충만하게 사역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의「기도의 신학」의 주기도문 강해 내용들은 실제적인 하나님의 나라 왕국 성취를 삶 속에 제시하고 있으며, 주기도문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이 기도 신학을 실제적 면에서 실천해 나가는 삶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위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지상명령 성취와 성령 충만하신 사역을 하셨다고 했는데, 주기 도문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주기도문에서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간구("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부터 특히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예수님 의 지상 대 명령 성취를 위해 주신 기도라고 여겨진다. 또한 주기도문에서 네 번째 간구부터 마지막 여섯 번째 간구는 성령 충만의 삶과 관련이 있다.

주님께서 이러한 기도의 내용들을 가르쳐 주실 때는 성령 충만하여야만 일용할 양식 앞에서 범죄 하지 않고, 죄에 빠지지 않고, 용서하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도가 바로 삶이 되어야하며, 성령 충만 하여야만이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에 주기도문을 통하여 기도하게 하셨다.

따라서 개혁주의 기도 신학에서 주기도문을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지상명령 성취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 기도를 드릴 때 그것이 바른 기도이고, 바른 기도 신학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실제적인 기도 신학에 접목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접촉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C.C.C. 국제본부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도용「4영리」소책자(Four Spiritual Law)소책자이다.

본인의 견해는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C.C.C. 선교단체를 계속 축복하시는 이유는「4영리」소책자와「성령 충만한 생활을 위한 비결」소책자를 통하여 "주기도문"의 삶을 실제적으로 지시하는 기본적인 도구가 준비되었고, 그것을 계속해서 전도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지상 명령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열매 맺는다면 실제적인 기도 신학은 주기도문의 정신과 함께 그 빛을 더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실제적인 개혁주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바른 기도와 함께 C.C.C. 국제본부가 사용하고 있는「4영리」소책자와 「성령 충만한 생활을 위한 비결」소책자를 교회 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한다. 한국 교회가 실제적인 개혁주의 기도 운동을 기대한다면 이런 부분들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제적이고 영적인 도구들을 개발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기도드릴 때, 한국 교회는 바른 기도 신학을 통한 성령 충만한 교회 로, 또한 21세기의 선교 주자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사용될 것 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될 때 무분별한 성령 운동이나 무분별하고 불경건한 신비주의 운동, 신비주의 이단.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 영적인 타락들이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도 신학"을 통한 바른 "개혁주의 기도"만이 이 시대 이 민 족과 세계의 영적 혼란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서 본인의 저서에 있는 "기도 내용 현상 연구에 대한 설문지”를 통하여 개혁 주의 기도를 뿌리 내리는 기도 신학의 실천적인 적용의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바른 전통을 가진 개혁주의 기도 신학이 그리스도인의 심령의 밭에 뿌려지고, 실제적인「기도의 신학」줄기인 주기도문에 담겨 있는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와서「기도의 신학」열매가 지구촌 가득히 맺혀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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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19 권세(송영)

국제기도공동체6392016년 12월 2일
12

090322 송영(나라)-1

국제기도공동체6182016년 12월 2일
11

090315 악에서구하옵소서

국제기도공동체6142016년 12월 2일
10

090301 용서

국제기도공동체5292016년 12월 2일
26

090222 일용할양식-3

국제기도공동체5402016년 12월 2일
25

090222  일용할양식-2

국제기도공동체4372016년 12월 2일
24

090222 일용할양식-1

국제기도공동체4872016년 12월 2일
23

090208 뜻이하늘에서

국제기도공동체5382016년 12월 2일
22

090118  이름이 거룩하게

국제기도공동체5992016년 12월 2일
21

08121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국제기도공동체5552016년 12월 2일
20

081207하늘에계신(주기도문2)TB 2003

국제기도공동체5852016년 12월 2일
19

081130주기도문설교1(강의파일)

국제기도공동체5162016년 12월 2일
18

기도신학영문 개혁주의 (P258-P267한글)           

국제기도공동체9022016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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